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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교육자·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1년 이후 사회주의에 입각한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결별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니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임시정부 법통 운동을 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하였다.

자(字)는 연하(蓮河),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김구는 자신의 호인 백범의 유래에 대해서 "독립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은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원(願)을 표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1]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사망 전 종부성사를 받았다. 세례명은 베드로[2]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海州) 출신이다.

생애[]

출생과 가계 (1876 ~ 1880)[]

김구는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에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안동 김씨 김순영(金淳永, 당시 24세), 현풍곽씨 곽양식(郭陽植)의 딸 곽낙원 (당시 17세) 부부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7대 독자로 알려져 왔으나 그의 아버지 김순영은 4형제였고 할아버지 김만묵, 증조부 김영원에게도 각각 형제가 있었다.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충렬공 김방경의 25대손이며 익원공 김사형의 21대손이었다. 김자점의 11대 방계 후손으로, 김자점의 옥 당시 그의 11대조로 사과(司果)를 지낸 김대충(金大忠)이 화를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개성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해주로 피신해 왔다. 해주군 서쪽 80리에 있는 백운방 텃골, 팔봉산(八峰山) 양가봉(楊哥峰) 아래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구의 선조들은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하여 양반의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행세하여 연명해왔다. 생계를 위해 군역전(軍役田)을 짓게 되었고, 그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부터 상놈의 패를 아주 차게 되었다 한다.

이렇게 되자 텃골 근방의 양반이던 덕수 이씨와 진주 강씨 일족에게 대대로 천대를 받게 되었다. 김구의 회고에 의하면 '우리 집안의 처녀가 강씨, 이씨 문중으로 출가하는 것은 영광이지만 두 문중의 처녀가 우리 집안으로 시집오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3]'라 하였다. 그러나 김구의 7대조 할아버지인 언함(彦喊)의 부인이 진주강씨인 경우도 더러 있었다. 상민이었던 가계는 김구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고 이를 탈피하기 위해 소년기의 창수로 하여금 과거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광복 이후의 김구의 가계를 소개한 것은 경순왕의 후손임을 강조했는데, 1947년 도왜실기한국어 번역판의 서문을 쓴 이승만은 그가 명문의 후손 임을 강조했고, 안재홍(安在鴻)도 김구가 암살된 직후인 1949년 8월에 쓴 백범김구선생약사(白凡金九先生略史)의 서두에서 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니 그 선조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후예라고 기술하였다.

김만묵(金萬默)의 둘째 아들로 24세의 미혼이었던 아버지 김순영은 그의 누이동생의 시누이(매제의 자매)가 되는 장연군 목감방(牧甘坊) 문산촌(文山村) 출신 현풍곽씨의 딸을 삼각혼이라는 방법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맞이했다 한다. 태어날 무렵 난산이었던 탓에 일가의 권유로 그가 태어나던날 밤 그의 아버지는 지붕위로 올라가 소울음 소리를 흉내낸 끝에 순산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가 태어나던 날은 그의 조모가 사망한 날이었다. 그의 초명은 김창암(金昌巖)이었다.

아버지 김순영은 학식은 없었으나 이씨, 강씨들을 닥치는대로 때려눕혔기에 해주감영을 제집 드나들 듯 하였다. 그를 두려워한 양반들은 그를 존위로 천거했다가 도존위로 승진시켰으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잘하고 양반들에게는 엄하게 대하였다. 하위 감투를 썼음에도 양반들에게 굴하지 않자 양반들은 아버지 김순영에게 공금흠포죄(公金欠逋罪)를 씌워 바로 해고해 버렸다.

유년기 (1880 ~ 1892)[]

유년기에 천연두를 앓았다. 이때 그의 모친이 예사 부스럼을 다스리듯이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얽은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4세 때 백부 김백영(金伯永)의 상을 당하였고 5세 때 그의 집안은 강령으로 이사하였다가 그가 7세 때 황해도 해주군 본향으로 되돌아왔다. 아버지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사 먹는 등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었다.[4][5]

문중에 할아버지뻘 되는 친척 중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이 친척 대부가 서울에 다녀오던 길에 자녀 결혼식에 쓸 갓을 샀다가 양반에게 빼앗기고 강제로 찢김을 당했다. 이 일로 몹시 충격을 받은 소년 창암은 과거 시험에 몰입하게 된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9세 때부터 한글한문을 배웠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통감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6]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唐詩) 등을 두루 습득하였다. 이러한 학문실력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배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를 짜서 번 돈으로 김구를 가르친 덕분이었다.[7] 황해도 산골에 숨어살던 그의 집안은 양반들의 학대를 참아가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 김구는 평생의 한이던 상민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노력하였다.[8] 한 번은 양반집의 아들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자 어린 창암 은 집에서 큰 부엌칼을 들고 그들을 찔러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8]

1888년 4월 할아버지 김만묵(金萬默)이 사망했다. 이 무렵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은 뇌졸중에 걸려 전신불수가 되었다. 그의 부모는 문전걸식하면서 아버지의 병치료를 위한 고명한 의원을 찾아 떠돌아다녔는데 이때 큰어머니 댁·장연 재종조 누이 댁 등을 전전하였다.[4] 아버지의 병은 차도를 보여 좀 불편하기는 해도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서서히 좋아졌고, 부모가 돌아오면서 그의 학업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이름있는 스승을 모실 수 없어, 큰어머니 정씨의 친정 6촌인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 부탁하여 무료로 통학하면서 글을 배우게 되었다.

17세에는 정문재의 권고로임진년 경과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7] 소년 김구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며 자신의 이름 대신 아버지 김순영의 이름으로 응시하였다. 이는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하여 상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시험 중 양반이나 부자들이 돈을 주고 대신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 대신 과거를 보게 하는 시험부정을 보고 분개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게 되었다. 과거 시험 당시 매관 매직의 타락상, 즉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파는 관리들의 비리를 보고 분노한 그는 서당 공부를 그만두고 3개월 간 집안에서 두문불출하고 관상 공부를 하였는데, 당시 자신이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병서를 탐독하며 집안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도 하였다.[7]

동학운동 참가 (1893 ~ 1895)[]

1893년 1월초, 그는 포동의 동학교도 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김창암(金昌巖)에서 김창수(金昌洙)로 개명하였고 입도 수개월 후 그의 휘하 신도(信徒)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4] 입교한지 1년도 안돼 연비(신도)를 수백명을 포덕하였으므로 이름이 알려져, 접주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상비방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1894년초 김구가 거느리던 연비의 조직이 급속하게 커져감에 따라 그는 18세의 나이로 수백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팔봉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3년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연비의 명부를 보고하라는 연락이 왔기 때문에 황해도에서 황해도 동학을 대표하여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접주 대표를 선발할때 황해도 대표자로 선발되었다. 1894년 가을 최시형을 찾아가는 황해도 동학 대표자로 선발되어 연비 명단 보고차 충북 보은에 찾아가서 최시형을 만나고 접주 첩지를 받아왔다. 귀향길에 한성에서 동학농민군 거병소식을 접하였고, 같은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해주 팔봉에서 거병하여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였다.[7] 그의 부하는 700여 명이었으나 일본군 부대가 쏘는 소리에 놀라서 모두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말았다고 한다.[8]

이후 김창수의 부대는 조직 내 세력싸움에서 같은 동학군인 이동엽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해 12월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 이동엽 일파의 기습공격으로 김창수의 포수 부대는 패하고, 고열과 함께 홍역을 앓던 그는 몽금포로 피신하여 몽금포에서 하은당 스님의 치료를 받으며 3개월간 잠적해 있었다.[4] 한편 김창수의 부대를 접수하려고 이동엽은 그의 최측근 영장 이종선(李鍾善)을 잡아 처형하였다. 아끼는 부하를 잃은 뒤 그는 이동엽을 묻어주고 안태훈을 찾아가게 되었다.

동학군 장수로 있을 때 안태훈으로부터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1895년(19세), 동학농민운동을 토벌하기 위해 의려소(義旅所)를 세워 경성김홍집 내각에 참여한 김종한의 원조와 황해 감사의 지도 아래 군대를 조직해 1894년 12월 접주 원용일의 부대 2,000여 명을 크게 이긴 적이 있을 정도로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던 지역 유력자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한다. 안태훈이 김구의 인품을 사랑하여, 동학이 패멸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고 생각하여 비밀리에 밀사를 보내 불가침협정과 공동원조계획을 세웠는데,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하자 안태훈에게 의탁하게 된 것이다.[9]

산채은신과 고능선의 가르침 (1895 ~1896)[]

1895년 2월부터 안태훈의 배려로 안태훈의 신천군 청계동 산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안태훈은 그를 배려하여 1895년 2월 그의 부모까지 모셔다가 산채에 함께 살게 했으며, 무례하게 대하는 측근들을 혼내기도 하였다. 안중근을 처음 만났으나 안중근과의 관계는 친밀하지 못하였다.

안태훈의 사랑에 들다 성리학자이자 화서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감화받았는데, 그로부터 공맹의 학문, 성리학적 대의명분과 의리, 위정척사적 가르침을 받고 춘추대의와 의리에 눈뜨게 되었다. 고능선은 청년 김창수에게 나라가 제국주의 열강들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해있음을 말해주었다. 김구는 그 뒤에도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을 추억하기도 하였다. 고능선은 화서학파로 이항로의 문인인 유중교의 제자이자 유인석의 동문이었으며 노론 계열이었다. 고능선은 청나라와 손잡고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 하며 청나라로 갈 것을 권하였다.

20세 에는 청나라행을 결심, 청나라로 가기 전 안태훈의 사랑채에서 참빗장수를 만났다. 연령은 김구보다 8~9세 위로 전라북도 남원 출신 김형진(金亨鎭)으로 그를 만나 백두산까지 기행하였다. 청년 김창수는 김형진을 길동무로 삼아 청나라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고, 백두산을 관람하고 만주를 돌아서 북경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평양 을밀대와 모란봉에서 휴식하다가 강동 양덕 맹산을 거쳐 함경도로 넘어서 고원, 정평, 함흥에 도착했다. 함흥에 도착해서 함경도의 교육제도가 황해도나 평안도보다 발전된 것에 탄복하였다. 단천, 혜산진을 지나 백두산 참배는 위험하다 하여 중단하고 만주 통화(通化)로 갔다.김이언을 만나기 전 청나라 장교를 만났는데, 중국어를 모르던 그는 종이에 한자로 써서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청일전쟁 당시 평양에서 전사한 청나라 장수 서옥생(徐玉生)의 아들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왔다가 실패하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계속 불구대천의 원수임을 알리자 청나라 장수는 자신은 금주(錦州) 출신으로 집안에 5백명의 가병이 있으며, 청나라로 동행할 것을 권하였으나, 김이언을 찾는 것이 목적이라 정중히 사양하였다.

압록강 근방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여 김이언의 부대가 강계성을 습격할 때는 포수를 모으는 일과 강계성에 들어가 화약을 사 오는 일을 하였다. 화약을 사오던 길에 압록강에 얼음에 빠져 동사할 위기에 처했으나 동민들의 구조로 살아났다. 강계성 습격 시는 11월 압록강이 완전히 얼어붙을 때로 정하고 공략하기로 결정, 그와 함께 청나라군의 원조를 받아 강계성의 관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몸을 숨겼다. 강계성 아래에 몸을 숨겼다가 신천군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귀향하였는데 스승 고능선의 장남 고원명 내외가 병으로 요절하였으므로, 고능선은 김창수를 손녀사위로 삼아 의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의 스승인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을 결정하였으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22일 안태훈은 해주군의 집사로 추정되는 인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순검들이 산포를 모아 청계동을 습격하려던 김창수(김구)를 추적했으나 김창수는 도망하고 말았으니, 자신도 김창수의 발자취를 사방으로 추적하고 있다' 고 보고하였다. 오영섭은 안태훈 자신이 청계동에서 김구를 일시적으로 보호했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논란이 일어나자 신천군수의 징계를 피하기 위한 보신적 조치로 보았다.[10]

치하포 사건과 은신 생활[]

치하포 사건과 수감생활 (1896 ~ 1897)[]

21세였던 1896년 2월 청나라로 향했다가 단발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1896년 2월 하순 평안북도 안주에서 길을 돌려 고향으로 귀환하던 중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에서 진남포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 빙산을 만나면 그는 사람들과 함께 내려 빙산을 의지하여 작은 빙산을 떠미는 방법으로 배를 빼낸 뒤 우여곡절 끝에 치하포 인근 5리 밖의 강 어귀에 정박하였다.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관방에는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이고 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있었다. 김구는 그 사람이 진남포로 간다고 하였으며, 장연 출신이면서 경성말을 하고 흰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굳이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은 평범한 상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인으로 변복한 것을 수상히 여긴 그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이거나 그의 일당으로 단정하였다.

김구는 아침 식사 시간에 밥값을 치르던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아 살해했다. 그는 일본군 중위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였다. 김구는 살인 이유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식당 주인 이화보(李化甫)를 시켜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11] 한편 자서전인 《백범일지》에는 쓰치다가 일본군 중위라고 쓰여 있으나 일본 외무성 자료엔 쓰치다는 대마도 이즈하라 출신의 상인라고 기록되어 있다.[12] 쓰치다가 소지하고 있던 옆전 8백전 중 선주들에게 선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방장인 이화보를 시켜 동리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석달후 자택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다. 해주 감영에서 고문당하다가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 경무관 김윤정(金潤晶)은 그에게 일본인을 살해여부를 묻고, 이어 재물을 강탈할 목적이냐고 추궁하였다. 사태가 큰 사안이라 본 경무관 김윤정은 인천부윤 겸 감리사 이재정(李在正)에게 보고하였고, 이재정의 추국 때 군부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몽백(상복)을 입지 않는것인데, 국모의 원수도 갚지 못하고도 몽백을 입는 것의 염치없음을 질타하였다. 추국하던 관리들은 부끄러워하여 이후로 그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공대하였다.

이어 11월 법부에서 김창수의 교수형 건의로 강도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으나, 고종은 판결을 보류하였다. 이는 우연히 승정원승지가 특이한 죄목명인 '국모보수'(國母報讐) 라는 단어를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이라 한다. 당시 국민들의 반일감정명성황후에 대한 원수를 갚아야한다는 '국모보수'(國母報讐)라는 [13]을 의식한 조선 법부는 고종 황제전화로 인천감옥장에게 내린 형집행 보류지시를 근거로 사형 집행 예정일 하루전날 형 집행을 보류시켰다.

개화와 죄수 교육 (1897 ~1989)[]

감옥 속에서 간수가 준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사>, <세계지리>를 읽고 개화사상과 신학문에도 눈을 뜨게 되었으며, 감옥안의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897년 강화 사람 김주경(金周卿)이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실패하였는데, 가산을 탕진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복하였다.[14]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면서 죄수들은 물론 억울한 일을 당한 간수들을 위한 대서를 해주었고 또한 동료 죄수들로부터 노래를 배웠다. 이때 그는 서양의 책인 세계역사와 세계지리 등 중국에서 발간된 서적을 읽으면서 서양인들이 원숭이에서 얼마 멀지 않은 오랑캐라는 사고를 버리게 되었다.[15]

승려 활동 (1898 ~ 1899)[]

1898년 3월 동료죄수들과 탈옥에 성공한다. 그가 탈옥하자 그 대신 부모가 붙잡혀 투옥되었다. 탈옥 후 삼남지방에서 도피하던 중 그해 가을께에 공주 마곡사승려가 되고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그러나 승려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승려들과의 마찰 등으로 후회하던 중 이듬해인 1899년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마곡사를 떠났다. 주지인 하은당은 뜻이 그러하다면 보내주겠다 하고 여비로 쓸 곡식을 주어 보내주었다. 이후 이곳저곳 방랑하며 동료 승려를 따라 평양부에 도착, 1899년 4월 동료 승려를 비밀리에 고향에 보냈다가 그를 따라온 부모와 상봉하였다. 식솔들을 이끌고 방랑중 5월 평양 영천암에 방장이 되어 방장으로 장발승려 생활을 하다가 환속한다.[14] 그가 환속하자 실망한 동료 승려는 그를 떠났고 99년 가을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작은아버지 김준영은 농사일을 권유하였다.[14] 그러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고 얼마뒤 본향을 떠난다.

교육계몽운동과 수감 생활[]

교육계몽운동 (1900 ~ 1910)[]

1900년 지인을 찾아 내려갔던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2년 1월 할머니뻘 되는 일가 대부인의 소개로 그의 친정조카뻘인 최여옥(如玉)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다. 이때 만난 우종서의 권유로 그는 탈상 후 자신의 일지에서 '예수의 도'로 묘사한 예수교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1903년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하였다. 김구는 홀로된 장모를 위로하고 예수교에 입교시켜 그리스도 신앙에 귀의케 하고 돌아왔다. 2월에는 부친상 3년상을 탈상하고 장로교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의 상징적인 교회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의 권유로 안신호(安信浩, 안창호의 누이)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하였다.[14] 1903년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가, 백남훈(白南薰)에게 학교를 인계하고, 김구는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16]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 모여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을사조약 반대에 대한 가두연설을 했다.[17] 그러나 정부의 강제진압으로 저지당하였고,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 뿐만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18] 1906년 종산군 서명의숙(西明義塾)의 교원이 되었으며,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를 맡았고, 1904년 29세 때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하였다.[6] 그는 최준례를 곧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수감 생활과 망명 준비 (1910년 ~ 1919년)[]

1910년 경성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가 열릴 때 신민회 대표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그해 12월 안정근을 만났다가 1911년 안악사건, 105인 사건 등으로 연루, 체포되어 이에 종신형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 1912년에는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19] 1915년 8월 가출옥하였다. 가출옥 직전 둘째딸 화경이 죽었다. 가출옥후 그는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安新學校)로 갔다.

1916년 문화 궁궁농장 간검(看檢)에 취임했고, 셋째딸 은경(恩慶)이 태어났다.[20] 1917년 2월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21]

상해 임시정부[]

상해 임시정부 활동(1919~1926)[]

임시의정원 의원과 경무국장[]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간여하였다.[22]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 직후 김구는 경의선 열차편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어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 소속의 선박을 타고 1919년 4월 중순경 상하이에 도착하였다.[19]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4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하였다.

9월 내무총장 안창호를 찾아가 문지기가 되기를 청하자 안창호는 그에게 경무국장(警務局長)을 천거하였다. 9월 경무국장(警務局長)에 취임하여 정보 및 감찰, 경찰 업무를 담당하였고, 일제의 밀정 검거 활동을 하였다.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로부터 공산주의 혁명에 참가하자는 제안이 들어오자 김구는 제3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을 들어 거절하였다.[23][24] 1920년 8월 아내 최준례가 아들 김인을 데리고 상하이로 건너왔다.[25] 1921년 5월 경무국장직에서 물러났고[26], 후임은 김용원이 임명되었다.[26] 경무국장에서 면직됨에 따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만 활동하게 되었다.

의정원 의원 재선과 내무총장, 국무총리대리[]

1922년에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상하이로 건너왔고, 그해 2월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25] 9월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에 취임하였으며, 차남 김신(信)이 출생하였다. 10월 여운형·이유필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한국노병회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25]

1921년 이후 임시정부가 임시정부를 새로 창조하자는 창조파와 구조만 수정하자는 개조파의 논쟁장으로 변하자 김구는 내무부령 제1호를 내려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킨다.[27]

1923년 4월 9일 내무총장에 재임되고,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에 임명되었다. 이후 임정은 개조론과 창조론이 계속 대립하였고 김구는 1923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을 내렸다. 12월 상해 교민단에서 의경대를 설치할 때, 의경대 고문에 추대됐다. 1924년 1월 아내 최준례가 상하이 홍구 폐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사망하여 불란서 조계의 숭산로 공동묘지에 장사하였다.[28] 최준례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했으나, 수배중이라 아내의 임종을 지킬수 없었다. 최준례는 뒤에 불란서 조계 숭산로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임정에서는 다른 요인의 부인들과는 다르게 불평불만이나 파란 없이 남편 김구를 내조한 최준례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최준례의 비석은 한글학자김두봉이 직접 지어 주었다.

이때 청년 오면직, 노종균 등을 파견하여 러시아레닌에게 지원받은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제출하지 않은 고려공산당원 김립 등을 추격, 제거하도록 지시하였다. 1922년 2월 11일 오면직, 노종균 등 을 파견해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 등을 사살했다.[29][27] 그러나 자금을 횡령했다는 주장은 공산당을 적대시하던 정적들의 모함이라는 견해도 있다.

백범일지에는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되었으나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30]

1920년대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1923년 이후 구미위원부 소속 허정 등은 구미위원부 통보를 통해 임정으로의 송금을 촉구했고 구미의 각 동포들은 각자의 여유에 따라서 10달러, 또는 20달러 등을 구미위원부로 보내주어 얼마 되지 않아 몇천 달러의 돈이 모였다.[31]

허정은 이 돈을 즉시 당시의 임시정부 재정부장 이시영(李始榮)에게 보냈다. 허정은 그때는 미국에서 상하이로 쉽게 송금했다고 한다.[31] 이 돈을 받자 김구와 이시영은 곧 감사와 격려의 편지를 허정에게 보냈고[31], 김구는 자신이 독특한 붓글씨로 쓴 친필 자서전 백범일지(친필)를 허정에게 선물로 보내주었다.[31] 1923년 12월 상해 한인교민단에서 의경대(義警隊)를 설치하였고, 김구는 상해 한인의경대 고문에 추대되었다.

임시정부 국무령·국무위원 취임(1926~1929)[]

1924년 4월 23일 국무총리대리에서 면직되었고, 6월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노동국총판을 겸임하였다. 1925년 이승만이 사임한 후, 박은식, 이상룡 등 잇단 사퇴와 사망 등으로 임시정부는 내각 구성에 실패하였다. 8월 29일 나석주 의사가 자신의 옷을 저당잡혀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어머니의 환갑 잔치를 못한 것을 죄스러워하던 김구는 이후 자신의 생일잔치는 하지 않았다 한다. 1925년 11월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차남 김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32]

1926년 9월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으로부터 국무령에 취임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김존위의 아들'이라는 미천한 출신 배경을 이유로 사양했다.[19] 그러나 임시정부는 1926년 12월 14일 김구를 국무령에 선출하였다. 국무령이 된 김구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제도를 고치고 주석을 맞았다. 1927년 4월 10일 후계내각 발표로 국무령에서 총사퇴하고, 국무위원회의 초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27년 8월 19일 이동녕 내각이 구성되면서 김구는 임시정부 내무부장에 임명되었다.[33] 이어 각 정당사회단체를 통합하는 움직임에 참여하여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조직 집행위원이 되었다.[34] 1928년 3월 상하이 불조계에서 이시영(李始榮),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1927년 9월에는 장남 김인도 고국으로 돌려보냈다.[34] 1929년 8월 상해 한인교민단장에 선출되었고[35], 1930년 다시 국무령에 선출되었다.[36] 1930년 1월 한국독립당의 재창당에 참여하였다.

일본 요인 암살 활동(1930~1933)[]

이봉창 의거 (동경의거)[]

1930년 8월 4일 국무령에 임명되었다. 1930년 11월 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재무부장(財務部長)에 선출되었다.[33] 1931년 임시정부 내에 일본요인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다.[37] 김구는 홍보하여 청년단원을 모집하였고 1931년일본어에 능한 이봉창(李奉昌)이 찾아왔다. 초기에는 일본어를 잘 구사하던 이봉창을 의심하였으나 신뢰하게 되었다. 이봉창이 왜 일본왕을 죽이지 못하느냐는 힐난에 자극을 받은 그는 이봉창이 묵던 숙소로 찾아갔고, 이어 일본 국왕 히로히토(裕仁)가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觀兵式)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일본 도쿄에 파견하여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잠수함 폭파 미수 (이즈모호 사건)[]

2월 12일 중국인 잠수부들을 고용, 상하이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신형 잠수정 이즈모호(出雲號) 폭파 계획을 세웠으나 선하에 폭탄을 장착하는 과정에서 머뭇거리다가 실패하였다.

윤봉길 의거 (상해의거, 홍구공원의거)[]

2월 윤봉길이 입단하자 중화민국 정부요인인 왕백수, 진과부 등과 중국군에 복무하던 김홍일의 도움으로 폭탄을 입수, 3월 3일 윤봉길상하이로 파견, 상하이 훙커우 공원 부두 근처 비행장 격납고 폭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상해사변에서 중화민국이 패전하여 비행장 접근이 어려워 실패하였다. 4월초,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 및 상해사변 전승축하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 윤봉길상하이 훙커우공원에 파견하여 훙커우공원 폭탄투척을 지휘하였다. 윤봉길 의거로 사라카와 등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행사 참석자들이 여러 명 부상하였다. 상해 사건 발생 직후 김구는 상하이를 빠져나가지 못하였으며, 안공근, 엄항섭과 함께 미국인 선교사 페이스의 집에서 20여 일간 숨어 지내야 했다.[38]

4월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만주사변을 규탄한 뒤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했고 국제연맹은 만주에 진상조사단을 파견키로 했다.[39]

유상근, 최흥식 의거 (다롄의거, 만철폭파미수)[]

1932년 5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軍務部長)에 임명되었다. 5월 일본의 만주철도국 사장 등 인사들이 국제연맹 대표단 방문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 5월 유상근(柳相根), 최흥식을 만주 다롄으로 파견하였다. 5월 26일 오후 7시40분 리튼 단장이 이끄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조사단이 다롄역에 도착할 때 유상근, 최흥식혼조 시게루(本庄繁)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에게 폭탄투척을 계획하였으나 의거를 며칠 앞두고 다롄 우체국을 통해 보낸 비밀 전문이 일본군 정보망에 걸려 유상근과 정보원 최흥식, 폭탄 운반책인 이성원ㆍ이성발 등이 모두 체포됐다.[39] 이봉창의 동경 일본궁성 폭탄투척사건과 윤봉길의 상하이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의 영향으로 중국 정부는 김구에게 생활비와 공작활동비를 제공해 주었다.[40]

의거사건 진상 발표[]

5월 상해 각 신문에 상해폭탄 의거의 주모자가 김구 본인임을 발표하고 상해에서 탈출했다. 그뒤 임시정부, 상해에서 항주로 옮길 때 군무부장에 취임하였으나,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사퇴하였다. 이후 가흥·해염 등으로 피신하여 광동인 '장진구'(長震球) 또는 '장진'(長震)으로 행세하며 숨어지냈다. 가흥에서 김구는 주애보라는 처녀 뱃사공과 위장결혼하여 일경을 피해다녔는데, 김구는 주애보와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중에 생겼다고 회고하였다. 하련생의 소설 '선월'은 김구의 가흥에서의 도피생활을 소재로 삼았다.

광복군 조직 활동(1933~1937)[]

1933년 강소성 가흥에서 일본경찰에 의해 추격당하였다. 이때 현상금 60만원이 걸렸다. 그러나 상해 법대총장 저보성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가흥으로 옮겼다. 1933년 5월 박찬익을 통해 장개석과 면담을 추진하였다. 중국 측에서는 진과부과 김구와 장개석의 면담을 주선하였다.[41] 5월 장개석과 만났으며, 면담에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하여 한국인 92명을 입교시켜 훈련에 들어갔다. 이듬해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도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였다. 4월, 강소성 가흥에서 어머니와 아들 김인, 김신을 다시 만났다. 1934년 12월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소속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했다.[42] 1935년 5월 임시정부 해소론이 나오자 임정 해소의 부당성을 지적한 임시의정원 제공 경고문을 발표했다. 7월 조소앙·김두봉 등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해체와 단일신당결성을 주장하여 한국독립당의 해체를 선언하였다.[43] 10월 김구는 가흥 남호의 선상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의원의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에 선출되었다.[44] 김구는 남경중앙정부와의 관계와 명망으로 중국국민당정부와 더욱 긴밀한 협조관계를 이루어 같이 항일운동에 힘쓰도록 협의하였다.[44]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42] 그리고 김구는 곧 한국국민당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유명무실화된 임시정부에 대한 해산주장이 일부 독립운동가들 중심으로 다시 제기되자, 김구는 이에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유지를 천명하였다. 임시정부의 유지를 주장한 김구 등은 1936년 10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김구는 임시정부를 강화할 것을 다짐하였다.[45] 8월 27일 환갑을 맞이하여 이순신의 陣中吟 [誓海魚龍動], [盟山艸木知]를 휘호로 쓰다.

1937년 안공근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안중근의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 일로 김구는 종가부터 챙기는 것이 도리라며 안공근을 질타하였고,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46] 그뒤 안공근은 김구의 대가족에서 이탈하였다. 1937년 김구는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정탐이 파악한 동향은 일본의 정보기관에 그대로 보고되었는데 당시 보고에 의하면 김구는 자신의 자동차를 갖고 있었으며, 김구는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고, 김원봉장쉐량 일파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47][48] 1937년 7월 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蘆山)에 초대되었다. 중화민국 정부측 대표자는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귀환하기 전 중국 정부 대표자로부터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49]

중일전쟁 직후(1937~1939)[]

중일 전쟁 직후 김구는 이승만, 미주국민회와 연락을 취했다. 1937년 8월 김구의 애국단, 이승만동지회,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돈 국민회, 그리고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대표 지청천) 등의 공동명의로 중일전쟁에 대한 한국 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언문을 발표했다.[50]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소앙, 지청천이 김구를 지지하며 그와 제휴하였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 및 국민회와도 연대하게 되었다.[50]

1938년 5월 후난성 창사 남목청에서 지청천 등과 회합을 갖고 민족주의 진영 3당의 통합 문제로 논의하던중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다. 현익철은 즉사하고 유동렬, 지청천 등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김구는 심장 옆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는데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절명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51] 네시간 이상 방치되었다가 김구는 병원으로 실려가 입원시켰다. 병원에 가료후 퇴원하였으나 이후 가슴에 남아있는 총알로 인해 거동의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김구는 이운한의 공범으로 강창제(姜昌濟), 박창세(朴昌世)를 지목하였다.[51]

1938년이후 민족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으나 민족혁명당 대부분은 1920년대 초반의 임시정부에 대한 창조론, 개조론, 임정고수론 논쟁 당시 개조파와 창조파에 참가하거나 기울었던 인사들이므로 유명무실해진 임시정부를 무시하는 태도를 공공연히 취하였다. 그러나 김구 등 소수인사들은 임시정부가 3.1운동의 결정체이며 민족의 대표기관이므로 해체되어서는 안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52]

1939년 모친 곽낙원여사가 폐렴으로 82세로 사망하였다. 사망하며 자신과 며느리의 유해를 고국으로 데려가라는 유언을 남겼고 김구는 노가산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가 광복서울로 운구, 이장하였다. 1939년충칭에서 김구는 각 단체의 통일을 추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승만은 김원봉, 김규식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단합하는 것을 극도로 반대했고, 민족혁명당에서는 각 단체들의 연합단체 구성에는 찬동하지만 기왕의 조직을 해체하고 하나의 당을 만드는 데는 찬동할수 없다고 하여 대동단합은 성사되지 못하였다.[53]

임시정부 주석 재임시[]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1940~1944)[]

1940년 3월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이 병사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에 선출되었다. 9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임되었고, 그해에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하고,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 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 주석 장제스광복군의 통수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 광복군중화민국군의 예하대로서 그 통수권은 중화민국 국민당군에 예속되었다.

4월 기강(朞江)에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여당으로서 (통합)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김구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54]

1940년 9월 김구는 중화민국 정부에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생활비 이상의 원조는 기대할수 없으므로 미국에서 활동할 의향을 밝히고 중국정부에 여행증서를 발급해줄 것을 요구하였다.[53] 중국정부는 이곳에서 무엇인가 업적을 남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충고하자 김구는 미국행을 단념하고 활동 계획서를 작성하여 중국정부에 제출하였다.[55] 1940년 9월 워싱턴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이승만을 임명하였다.[53] 이후 구미위교위원부위원장 이승만 등 재미인사들과 연락하여 미국 국방성과 접촉, 광복 직전에는 미군 특수사령부(OSS)와 합동 훈련으로 조선에 잠수함으로 광복군을 침투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1941년 10월 반파쇼 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연안에서 개최된 동방각민족 반파쇼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대회의 명예주석단의 1인으로 선출되었다.[56]

주석 재선과 좌우연립정부 구성(1944~1945)[]

1940년 좌파정당인 민족혁명당무정부주의자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다. 그해 승인거부되었던 구미외교위원부를 다시 승인하고 이승만을 구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했다. 1941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의 승인에 관련된 문제로 중화민국 외교총장과 회동하였다. 그해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표하는 한편, 12월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46] 1942년 2월에는 김성숙, 김원봉, 장건상좌파들이 임시 의정원에 참여하였다. 5월에는 김원봉을 군무부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중국내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 대립으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많았다. 당시 임정 내부 좌·우파의 갈등은 1943년 민혁당측이 한독당의 김구(金九) 등 국무위원 5명을 암살제거하고 민혁당의 김원봉 등이 대신 입각(入閣)하겠다는 미수로 끝난 모의문서도 발견되었다. 미국에 체류중인 이승만은 김구에게 항의하며, 이들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1943년 7월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전후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8월 민혁당과의 갈등으로 주석직 사임을 발표하였다가, 9월 다시 주석에 복직하였다.[46] 1944년 4월 임시정부에서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출되어 취임하였다. 8월 중화민국으로부터 한국 광복군 통수권을 되돌려 받았다. 8월 한국 광복군 통수부를 설치하고 통수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임시정부 주석 겸 광복군 통수부 주석으로 광복군의 통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이요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그는 광복군 통수부의 주석도 겸하여 당권, 정권, 군권을 모두 장악, 당·정·군의 삼위일체의 지도체제를 확입하고 광복군을 이끌며 그 확대, 발전을 도모하였다.[57] 9월 그는 중화민국 주석 장개석을 만나서 면담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귀국 직전[]

1945년 4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육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같은해 초, 장남 김인이 중국에서 병사하였다. 7월 한국독립당 대표대회에서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재선출되었다. 8월 서안에 가서 미군 도노반 장군을 만나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에 합의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8월 15일 섬서성에서 섬서성 주석 축소주(祝紹周)로부터 광복 소식을 접하였다. 외국의 힘으로 해방된 것을 통탄해하였다고 한다. 8월 18일 김구는 중경 임시정부로 귀환하였다.[58]

1945년 9월 3일 김구는 임정 국무회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하였다. 당면과제에 의하면 ‘임정 입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전국적 보통선거 실시→정식정부 수립’등 임시정부에서 정규 정부수립 방안을 제시하였다.[19] 김구는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을 원하였으나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의 환국을 추진했으나 미군정은 정부자격의 귀국을 반대, 존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은 개인 자격의 환국을 주장하였다.

11월국민당의 송별식에 초대되었고, 중국공산당의 송별연에도 참석하였다. 11월 3일 상하이 비행장에 도착한 뒤 임시정부 환국 제1진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중국을 출국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귀국을 놓고 서로 먼저 가겠다고 하였으나 민족혁명당김원봉의 양보로 김구와 한국독립당 계열이 먼저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시 민족혁명당의 당수였던 김규식도 한국독립당계와 함께 귀국했다. 귀국 무렵 김구의 집단은 미국 헌병의 보호를 받았으며 김구의 개인경호원들도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되었다.[59]

광복, 그리고 환국[]

광복초기 정치활동(1945~1946)[]

귀국 직후[]

김구는 11월 3일 임시정부 1진으로 귀국하여 김포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이후 지주 최창학이 기부한 죽첨정(경교장)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으나 김구는 '내가 귀국할 때 한국의 정부도 돌아오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60]

김구는 조선공산당에 가담해 있던 김두한을 찾아가 선친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들의 적색테러의 희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주었다.[61] 이범석에게도 "너의 아버지를 죽인 자는 공산주의자"라는 소식을 접하고[62] 그뒤 염동진에게서도 비슷한 설득을 듣자[63][64] 김두한은 그대로 우익으로 전향하여 우익청년단체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1월 23일 김구는 바쁜 와중에도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 휘호를 작성하여 헌정하였다.[65] 복간축하 휘호의 내용은 '유지자 사경성'(有志者 事竟成)으로 '뜻이 있으면 끝내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65]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는 순국선열추념대회를 조직, 주관하였다.[66] 순국선열추념대회 총재로 선출되었다.[67] 12월 25일 돈암장이승만을 방문하던 길에, 전속 주치의 류진동을 대동하고 돈암장 산기슭 판자촌을 찾아 세민을 위문하였다. 12월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했다.[46]

반탁운동 개시[]

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김구는 이승만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신탁통치 결의문을 입수해 검토한 뒤, 곧 반탁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12월 29일 임정 주최로 경교장에서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이때 석상에서 김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우리들은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 독립정부를 우리들 손으로 세워야 한다" 고 절규하였다.[68] 김구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자는 매국노라고 규정하였다.

12월 29일 저녁 송진우가 경교장을 찾아와 김구와 만났다. 송진우의 전기작가는 그가 김구로 하여금 신탁통치 문제에 관하여 미군정과 정면대결을 피하게 하려고 시도했다고 말하였다.[69][70] 브루스커밍스에 의하면 김구는 경교장을 방문한 송진우가 반탁운동에 가담하도록 설득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분명하며 송진우가 여진히 미국치하의 후견기간을 주장하고 있다는 확신을 받은 것 같다고 보았다.[69] [70] 송진우와의 면담은 12월 30일 새벽4시에 끝났으며 두 시간 후 송진우는 자택에서 청년단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송진우를 암살한 암살범중의 한 사람인 한현우는 후에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 동기였다고 말했다. 다른 증거는 한현우를 김구와 연결시켰고, 커밍스는 한현우의 배후를 김구라고 보았다.[71]

12월 30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하지에게 보냈다. 12월 30일 하지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김구의 성명서를 맥아더에게 송신하였으며, 미국이 이것을 모스크바 협정에 언급된 3개국에 전달해줄 것을 강조하였다.[72]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신탁통치반대위원회는 반탁시위를 주관하였고,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의 포고령이 떨어지자 미군정청의 한국인 직원들이 파업을 선언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1946년 1월 1일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호출되었다. 불려갔다 온 김구는 파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고[73] 엄항섭 대독을 통해 군정청 한국인 직원의 복귀를 촉구했다.

송진우 암살 사건이 전해지자 하지 사령관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1946년 1월 1일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74]

1946년 1월 3일 갑자기 조선공산당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의 지지로 돌변했다.[75] 신탁통치에 반대하였다가 좌익세력이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서자 김구는 조공의 표변을 들며 '조선공산당은 반민족적 집단이고 신 사대주의자'라고 낙인찍고 맹비난을 퍼부었다.[76]

김구는 김성수, 조소앙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한편 우파 내에서도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고 본 김규식, 안재홍은 찬탁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신탁통치반대운동(1946)[]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되었다. 김구와 이승만은 미소공위 반대와 공위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공위 찬성의 입장에 서게 됐다. 한국민주당장덕수가 찾아와 김구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였다.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열렸다.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김구는 김규식, 이승만, 조만식,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77]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비상국민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비상국민회의는 이승만, 김구에게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주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28인의 최고정무위원을 선발했다.[77]

이어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총리에 선임되었다.[78] 2월 14일 아침 미군정청 1회의실에서 민주의원이 개소된다는 보도를 접한 김창숙이승만·김구가 민족을 파는 반역자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77] 민주의원 지도부 구성은 김구와 이승만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좌익은 배제되었다.[79] 2월 14일부터 2월 17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80]

원래 김구는 이승만이 빠른 시일내에 미국으로부터 정부수립에 대한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하에 이승만의 도미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 일부 인사들이 이승만의 생각과는 달리 3.1절을 전후하여 정부수립을 추진하려던 계획이 알려지고 말았다. 신문에서는 아이들 장난으로 조소하였고 이승만, 한국민주당 등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미숙한 자살행위라고 비판했다.[80] 3월 5일3월 6일 미군정에 의해 이시영,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과 함께 주한미군 사령관실로 불려가 잡아넣겠다는 협박을 받고 굴복, 계획은 불발로 끝나게 됐다.[80]그해 4월 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이 한독당으로 통합되자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81] 3월 20일에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예상했던 대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소공위는 소련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82]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83]

김구는 미소공위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지 않았다. 하지민주의원 의장대리 김규식은 김구가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려 하지 않자 그것에 서명할 것을 종용하면서, 서명이 곧 신탁문제에 언질을 준 것은 아니라는 특별성명 등을 발표했다.[83] 그리하여 이승만, 한민당 측에 이어 김구가 서명에 동의하자 소련측이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5월 초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83]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84]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위에 제출되었다.[85]

1946년 5월 경제보국회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이승만이었다.[86] 6월 이승만전라북도 정읍에서 단독정부론을 말할 때 김구는 탈장증으로 용산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 김구의 제자인 상공회의소 강익하가 찾아와 김구에게 3백만원의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건넸으나 그는 국사에 쓰일 돈이라면 이박사(이승만)에게 드려서 쓰게 하라며 돈이 필요하면 이박사에게 얻어쓸 것이라며 사양하였다.[87] 6월 11일 독립촉성중앙회 국민회가 정동교회에서 개최될 때 참석하여 이승만의 연설에 대하여 답사를 발표하였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가 설치되자 부총재에 선출됐다.[88] 10월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47년 미국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백의사 대북 타격작전 지휘[]

1946년 2월말 김구와 신익희염동진백의사에게 모종의 지시를 내렸다.

3월 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평양역 앞에서 '3.1 운동 27주년 기념식'을 열었는데, 백의사 청년단원들은 김일성에 대한 폭탄을 던졌다. 집회가 진행되는 도중 연단을 향해 수류탄이 던져졌는데, 집회의 경비를 담당한 소련군 부대장 노비첸코 소위수류탄을 되잡아 던지려다가 그의 손에서 폭발한 것이다. 노비첸코는 이 폭발로 오른팔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을 다치는 중상을 입었지만, 김일성은 무사했다.[89][90][91]

김구와 신익희의 지시를 받은 백의사는 3명의 청년을 평양으로 보냈는데, 북한3.1절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사람은 남한에서 올라간 열여덟 살 소년 김형집이었다.[89][92][93] 나머지 요원들은 최용건김책의 집에도 습격·폭탄을 던졌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강양욱의 집에 던진 폭탄은 강량욱의 아들과 딸을 죽게 만들었다.[89][92][93]

청년단원 중 한명이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의 명의로 2월 15일에 발급된 무임승차권[94]을 분실했고[89][95][93] 이는 북한측에 의해 입수되었다.

이 테러가 임정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증거를 확보한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격렬히 비난하였다.[96]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봉건 잔재세력과 외국 팟쇼세력과 제국주의 잔재세력과 친일파의 삼위일체”이자, “이완용을 배운 조선매국노”로 규정짓는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조선공산당은 김구의 귀국시 그들의 기관지를 통해 '김구를 민족혁명의 지사', '반제에 일생을 바친 고결한 지사'로 예찬했었지만. 이 테러사건 이후 김구는 북한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히고 말았다.[96]

임정법통과 건국운동(1947)[]

1947년 1월 18일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에 참석하였다. 1월 18일 하오 2시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가 서울특별시경성 천도교 강당에서 각급학교 맹원 2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김구는 김성수와 함께 이 대회에 격려사를 하였다.[97] 한편 이승만, 김구 등은 서북청년단 등에도 종종 경제적 지원을 해주곤 했는데 이는 대부분 일회성이었다.[98]

1947년 1월 18일 김구의 주도로 우익진영은 전국반탁학련 반탁궐기 1주년을 기념, 대대적인 반탁데모를 계획하였다. 몇사람의 희생도 불사하는 소요를 일으키겠다는 것이었으나 이승만의 만류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의 경고로 김구는 반탁시위를 보류하였다.[99] 1월 18일 우익진영의 반탁행사는 천도교당에서 열린 학생들 주도의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로 축소되었고, 김구는 오늘만은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99]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촉성중앙회김규식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한다고 결의하자, 김구가 위원장으로 있는 반탁투쟁위원회에서는 합작위원회를 유령집단으로 공격했다.[100],

2월 14일~2월 17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만약 이승만이 조속히 미국측으로부터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로 하여 이승만의 도미를 찬성하였기 때문에 이젠 자기 길을 걷겠다고 나선 셈이었다.[80] 김구는 임정 계열과 함께 이승만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3.1절 전후로 정부 수립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의 3.1절을 전후하여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계획은 기밀이 누설되어 널리 알려지고 말았다. 신문에서조차 '아이들 장난'으로 조롱하였고 이승만한민당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자살행위'라며 비판했다.[101] 미군정은 김구와 이시영,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을 호출하였고, 군정의 호출을 받고 3월 5일 임정 요인들을 데리고 주한미군사령관실을 방문하였다. 군정청은 그들을 잡아넣겠다고 협박했고 이들은 이에 굴복하여 정부수립 계획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정해구는 김구의 이같은 시도에는 '이승만 부재시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의한 김구의 의도도 작용하고 있었다, 결국 국민회의를 통해 과도정부를 수립하려던 김구의 이같은 시도는 미군정의 적극적인 대처와 여타 세력의 지원부족으로 제대로 성공할수 없었다'고 평가했다.[101] 한편 김구의 반탁노선에 반발한 한독당 내의 안재홍, 박용희, 조헌식, 이의식, 이승복, 장지필, 엄우룡 등 구 국민당 세력은 반탁노선에 반기를 들고 미소공위의 성공을 위해 한독당을 이탈하기도 했다.[102]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김구이승만과 반탁투쟁을 전개했다.[103]

6월 19일 미소공위 참석 문제를 놓고 여러 단체간 이견이 존재하자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과 김구만 고립되었고, 한민당의 변화에 분노한 이승만과 김구는 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인 1947년 6월 23일 여러 곳에서 반탁 시위가 벌어지게끔 주도하였다.[104][105] 서울 시위를 주도한 전국학련의 반탁시위대는 소련측 공위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맹활약을 하였으며[106] 6월 23일 이철승과 전국학련 주도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다. 김구는 친필로 6.23 반탁데모에 장군 남이가 지은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후에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라는 시를 선사하여 격려하였다.[107][108] 그러나 그러나 김구와 이승만의 격려와 지원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군중동원에 실패하고 말았다. 6.23 반탁시위는 10만명을 동원했다는 우익신문들의 보도와 달리 3,4천명에 불과해 대규모 군중을 동원하는 데는 실패했다. 9월 17일 미군정은 한국 문제를 UN으로 이관한다고 밝혔다. '미소공위를 통해 한반도에 민주적 독립국가를 설립한다'는 계획을 포기한다는 선언이었다. 소련은 반발하였고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109]

1947년 11월 김구는 이승만의 노선에 협조하는 대신 김구의 국민의회 중심으로 우익이 단결하는 데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내었다.[110]

1947년 11월 24일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111] 그러나 김구는 11월 30일 이화장이승만을 방문하여 한시간을 회동, 자신과 이승만의 근본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하였다고 성명을 번복하여 발표하였다.[111] 성명서 발표후 이승만과 함께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하였다.[111][112][113]

1947년 12월 1일 김구는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의 단독 정부론과 내 의견은 같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114]

1947년 12월 2일 장덕수가 자택에서 피살되자 김구는 그 배후로 지목되었다. 장덕수는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15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현직 경찰이던 박광옥(朴光玉)과 초등학교 교사였던 배희범 등 5명이 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배희범을 체포하였다. 용의자 6명은 장덕수를 암살할 목적으로 1947년 8월 창단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학생총연맹은 47년 6월 운현궁에서 발족되었는데 김구를 총재, 조소앙과 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115] 박광옥종로경찰서의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고, 배희범은 초등학교 교사로 모두 한독당 당원이었다.

미 군정경찰은 김구가 이끄는 국민회의 간부 10여명을 연행하는 등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은 빠졌는데 그 중 한국독립당과의 통합을 가장 반대하던 사람이 장덕수였다. 이 점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시각에 무게를 더해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민당의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하였다.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 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115][116] 용의자들은 재판에서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할것과 해방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가였다는 것, 일본헌병대의 촉탁인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이 암살 동기라고 주장하였다.[117][118][119] 장덕수의 암살로 김구와 이승만·한민당의 단결은 무산되고 말았다.[110]

남북협상(1948~1949)[]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승만은 응답을 회피했고, 이승만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면서 따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120]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120]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딛쳐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120]

1948년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발송하였다.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2월 10일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냈다. 3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을 표명하였다.[121] 1948년 3월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 혐의로 미군정의 재판을 받게 되자, 건국실천원양성소 소원 50여 명은 혈서를 써서 군정청에 항의하였다.[122]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비판을 받았다.[123] 한편 한민당으로부터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이 남로당 주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느니, 그들이 "크레믈린 궁의 사자"라느니 하며 비난을 받았다.[123] 한민당은 총선거에 임하여 만천하 동포에게 고함 에서 김규식은 한때 공산당원이었으니 그 태도가 공산당과 동일할 것은 필연의 귀결로 볼 수 있고, 김구도 토지국유정책 등을 볼때 공산당과 통할 가능성이 있다.[123]는 공격을 당했다.

남북협상 참여 당시 그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북행 직전 장건상은 김구를 찾아 방북할 의향이 있는가를 물었다. 그러나 김구는 방북할 의향이 없다는 의사를 밝혀왔다.[124] 1948년 4월 김구는 김규식 등과 함께 북행을 결정하고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나타나자 장건상은 놀랐다고 회고하였다.[125] 이어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하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121] 남한의 주요 정치인사들은 북행하였으나 연석회의에는 불참하였다. 이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형식적인 인사말만 하였다.[126]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열린 YMCA임시회의에 연사로 참석한 윤치영으로부터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127]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열린 '4김 회동'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도 김일성 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측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하면서 북측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김일성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역시 반대하였다. 1948년 5월 다시 돌아왔다.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내려가게 해줄것을 부탁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며 거절하였다.[128]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연석회의 당시 대부분의 인사들은 김일성 만세를 불렀고, 그러면 누군가 술을 따라주고 밴드가 울린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전혀 김일성 만세 라는 말을 안했다.'고 증언하였다.[129]

남북협상의 실패[]

김구의 남북협상 참가 배경에 대해, 남북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졌다고 한다. 김구가 남북협상을 다녀온 후, 한독당 중앙 간부에게 북한방문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일부가 남로당에 유출되었는데, 이를 목격한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에 의하면 김구의 생각이 나와있다고 한다.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이북사람들이 전부 김구를 지지한다.' 그래서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 "만일 단독정부를 하면 남한에서는 이승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되는데, 통일적으로 하면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 고 확신했다는 것이다.[130]

김구는 남북협상에서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것을 알고 침울하게 보냈다. 김일성이 2차 회의를 제의해 왔을 때는 완전히 거절해 버렸다.[131] 1948년 7월 21일 김규식과 함께 통일독립자 촉진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통일독립자촉진회 주석에 추대되었다.

김구는 반공주의자였고[132] 김규식 또한 반공적이어서 두 사람은 통일독립촉진회에 친북인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북의 정부수립을 배신행위로 단죄하고 북한·좌익과 선을 긋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132]

말년[]

그해 8월 김구는 어머니 곽낙원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서울특별시 정릉에 안장했다.[133][134] 이어 차남 김신을 시켜 상하이쓰촨성 충칭에 있는 부인 최준례, 맏아들 김인의 시신을 발굴하여 천장식을 기독교회 연합장으로 거행하고 정릉 가족묘지에 안장했다.[133][134] 어머니 곽 여사의 유골을 정릉 뒷산에 안장할 때 기수들이 기마의 장대 역할을 맡아 운구차를 호송해주었다.[135] 경마 경주를 좋아하였으나 이때 운구를 호송해 준 기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그는 이후 주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경마장을 찾기도 했다.[135] 이승만도 경마장을 자주 찾았고, 이때부터 경마대회 시상 중 이승만상, 김구상이 즉석에서 생겨났다고 한다.[135]

1948년 11월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121] 1949년 1월 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석상에서 남북협상에 대해서 일부 인사들이 부정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피력하면서 북한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맹약 파괴에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136]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였다. 같은달 서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웠고,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교를 세웠다.[121]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의 총격 암살당하였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절명하였다.

명동성모병원 원장 박병래는 정모 수녀 등 몇몇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주었고[137] 베드로 라는 세례명을 받았다.[137] 생전에 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137] 당시 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하였다.[138] 며느리인 안미생의 권고도 있었다 한다.[138] 6월 26일 사망하자 성모병원 간호수녀들이 시신을 염하였다.[138]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소령, 김병삼 대위,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단장,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이 가담하고, 홍종만, 안두희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배후는 미궁이다. 같은해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사망 당시 김구의 나이는 만 73세였다.

사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 《백범일지》《도왜실기》· 《백범어록》 등이 있다.

1960년 백범 김구 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암살범 안두희(安斗熙)의 출국을 막고 시해 진상규명운동을 꾸준히 벌여 왔다. 1963년 서울특별시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다. 1998년 백범기념관이 준공되어 2002년 10월 22일에 건립되었다.

2007년 11월 5일,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 집권 후 일부 세력들이 이승만 사진으로 바꾸자고 주장하는 등 반발이 심해서 현재 10만권 지폐의 발행은 전면 취소되었다.[139][140]

기타 약력[]

1910년대 이전[]

  • 1884년 백부 김백영 사망
  • 1888년 조부 김만묵 사망
  • 1892년 임진년 경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서당 공부를 그만두었다.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마의상서로 관상 공부. 그외 서적들을 두루 탐독하고 집안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을 하였다.[141]
  • 1901년 부친 김순영 사망
  • 1902년 여옥과 약혼
  • 1903년 약혼녀 여옥 사망[142]
  • 1904년 12월 최준례(崔遵禮)와 결혼, 장련 읍내로 이사.
  • 1905년 11월 대한매일신보 황해도 장연지사장[143]
  • 1907년 2월 대한매일신보 황해도 장연지사장 사퇴
  • 1910년 신민회에 참가.

임시정부 활동[]

  • 1926년 12월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출됨.
  • 1928년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 1929년 5월 백범일지 상권 탈고, 8월 상해 교민단 단장에 선출.[42]
  • 1930년 8월 4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
  • 1932년 일본 쇼와 천황 살해를 노린 사쿠라다몬(櫻田門) 폭탄투척 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쇼와 천황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지휘.
  • 1935년 한국국민당 조직.
  • 1940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
  • 194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충칭(重慶)으로 이전. 한국 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갖고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임.
  •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 광복군 침투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

광복 이후[]

  •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내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144]
  • 1945년 11월 2일, 존 하지 중장, 주한미군 사령부 참모회의 석상에서 "김구는 스튜(고깃국)에 필요한 소금이 될 것이고, 그의 출현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함.
  • 8.15광복 후 1945년 11월 23일 미군 수송기 편으로 임정요인 환국 제1진으로 귀국.
  • 1945년 11월 24일 존 하지 중장, 김구를 "조선을 극히 사랑하는 위대한 영도자"로 묘사.
  •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삼상회의 결정서를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
  • 1945년 12월 24일 한국소년군 총본부 총재에 추대되기도 하였다.[145]
  • 1945년 12월 27일 김구는 삼천만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주제의 방송담화(엄항섭 대독)에서 강력한 국방군의 건설을 주장하기도 했다.[146]
  • 1946년[1월 전국반탁학련 반탁 궐기대회 1주년을 기념하여 46년과 같은 몇사람의 희생도 불사하는 대대적 반탁데모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만류와 존 하지의 경고로 보류하였다.[147]
  • 1946년 1월 18일, 반탁전국학생연명(반탁학련) 데모대가 김구에게 반탁학생대회의 경과를 보고하기 위해 김구가 주도하는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가 있는 서대문 서교장으로 향했다. 신문로에 이르렀을 때 좌익성격의 학병동맹원들과 충돌하였다. 같은 날 천도교 교당에서 열린 학생들 주도의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로 행사를 축소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오늘만은 과격한 행동을 삼가하고 조용히 해산해줄 것을 당부하였다.[99][148]
  •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된 데 이어, [149] 1946년 2월 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부의장이 되었다.[149]
  • 1946년 3월 1일 이승만과 함께 3.1절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를 주관하였다.
  • 1946년 6월 일본에 사람을 파견하여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 유골을 찾아, 국민장으로 효창원에 안장하였다.[121] 한편 방응모등의 재정적 후원을 얻었다.틀:출처
  •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수립을 발표하다. 그러나 이때 김구는 탈장증세로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150]
  •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김구는 이승만·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151]
  • 1947년 1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제2차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121]
  • 1947년 1월 18일 우익진영의 반탁행사인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에서 참석하여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152]
  • 1947년 1월 24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위원장 맡음.
  • 1947년 3월 12일 미국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김구는 '트루먼이 전세계 자유애호 인민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 1947년 9월 17일 미군정이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겠다고 발표하자 소련은 강력 반발하였다. 이때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153]
  • 1947년 12월 국사원에서 백범일지 출간.[121]
  • 1948년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 19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반대 성명 발표
  •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 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여, 1948년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 1948년 3월 장덕수 암살사건의 증인 자격으로 미군정청 재판정에 출두하였다.[154]
  •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4김 회동'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 김일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 1948년 8월 어머니 곽낙원 여사, 장남 김인의 유골을 봉환하고, 9월 이동녕·차이석 선생의 유골을 국내로 봉환 천장식을 하고 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하다.[121]
  • 1949년 1월 서울특별시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움.
  • 1949년 3월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원 세움.[121]
  •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함.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됨.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2009년 6월 26일 소지품인 회중 시계, 유묵 작품 3점, 인장(印章) 3점 및 피살 당시 착용한 혈의(血衣)가 등록문화재 439호~442호로 등록

일화[]

선우진의 증언으로는 경교장 생활은 전혀 풍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선우진은 정기적으로 얼마씩 들어오는 형편이 아니어서 재정적으로 어려웠으며 돈과 관련된 일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던 탓에 자연 선생을 모시는 우리 생활도 여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한번은 1946년에 상공회의소 부회장 강익하가 300만 원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전달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그 돈을 받지 않고, 이승만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이승만에게는 이미 500만 원을 보냈고, 상공회의소 공의(公議)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김구는 이승만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한미호텔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의 형편이 어려워 점심을 굶는 일이 많게 되자, 주위에서 김구에게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던 이승만에게 돈을 부탁해보라고 했다고 한다. 김구가 마지못해 돈을 부탁하러 돈암장을 찾았는데, 이 박사가 난색을 표해서 그냥 돌아왔다는 의견도 있다. 조완구 선생과 엄항섭이 다시 김구에게 어려운 형편을 말하자 김구는 이 박사를 다시 찾아가 30만원을 얻어 한미호텔에 있던 요인들의 경비로 사용했다. 선우진에 의하면 김구를 수행하여 돈암장을 방문했었는데, 이승만은 "남들은 모두 내게 돈을 주는데, 백범은 내게서 돈을 가져가는구먼"하며 입을 실룩거렸다고 하며 김구는 아무 표정 없이 돈암장을 나섰다고 한다.[155][156]

한편 재정적으로 어렵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상해 시절에 대한 증언으로 안공근과 감정이 있었던 백찬기는 '김구파의 간부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나와 같이 병으로 쓰러진 사람에 대해서는 의료원으로 가라고 여비정도만 주어 쫓아버리는 식'이라며 비판하였다.[157][158]

박갑동은 "경교장에 가서 만나면 언제나 김구 선생은 한복차림으로 있었다. 내가 김구선생과 얘기하고 있을 때 비서가 와서 외출하자고 하니까, 바지저고리 차림의 김구 선생이 일어섰다. 그러면 비서가 두루마기도 입혀 주고, 모자도 씌워 주면서 문도 열어주는데, 손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비서가 구두도 신겨 주고, 손에다 지팡이를 쥐어 주는 모습이 영락없는 조선왕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155][159]

저서[]

  • 백범일지
  • 도왜실기
  • 백범어록

가족 관계[]

김구의 자서전《백범일지》에 따르면 김자점의 후손인 아버지 김순영은 중풍으로 몸이 불편했으며, 잘못을 저지르면 엄하게 교육하는 아버지였다고 한다. 어머니 곽낙원은 중국 중경 거주시, 아들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때 권총을 구입하여 줄 만큼 열심히 아들을 지원했다.

  • 증조부 : 김영원(金榮元)
    • 종조부 : 김일묵(金日默)
  • 조부 : 김만묵 (金萬默, ? ~ 1888년)
  • 아버지 : 김순영 (金淳永, 1848년~ 1901년 2월)
    • 큰아버지: 김백영(金伯永, ?~1884년)
    • 작은아버지: 김필영(金弼永)
    • 작은아버지: 김준영(金俊永, ?~1917년 1월[160])
    • 고모:
  • 어머니 : 곽낙원 (郭樂園, 1858년 2월 26일 ~ 1939년 4월 26일)
  • 부인: 최여옥(汝玉, 약혼 중 사망, ? ~ 1903년)
  • 부인: 최준례(崔遵禮, 1889년 ~ 1924년 1월)
    • 아들: 김인(金仁, 1918년 11월 ~ 1945년 2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장교, 중화민국 육군 소령
    • 며느리 :안미생(安美生, 안중근의 조카)
      • 손녀 : 김효자(金孝子, 1941~ ), 장자 김인의 딸
    • 아들 : 김신(金信, 1922년 2월 11일~) 대한민국 6대 공군참모총장, 교통부장관, 주중국 대사, 국회의원 역임, 현 백범기념관 관장
    • 며느리: 임윤연
      • 손자 : 김진(金振, 1949년 10월 30일 ~ ) 대한주택공사 사장 역임
      • 손자 : 김양(金揚, 1953년~ ) 상하이 대사 역임
      • 손자 : 김휘(金揮, 1955년 ~, 나라기획 이사 역임)[161]
      • 손녀 : 김미, 한화 그룹 회장인 김승연의 동생 김호연과 결혼[162]
    • 딸: 이름 미상(1906년 ~ 1907년)
    • 딸: 김화경(1910년 ~ 1915년)
    • 딸: 김은경(1916년 ~ 1917년 2월)
  • 외조부 : 곽양식(郭陽植)
  • 사돈 : 김승연(金升淵, 1952년 2월 7일 ~ ) 기업인

평가와 비판[]

당대의 여론[]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18%가 김구를 지목하였다.[163] 그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293명이 김구를 지목하여 2위로 집계되었다.[163]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56표를 얻어 4위였다.[163]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702표로 전체의 10.5%를 확보했다 한다.[163]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568표로 2위를 하였다.[163]

박용만이승만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164]라고 평가하였다.

평가[]

김구는 이념을 내세워 분열시키는 냉전세력을 비판함과 함께 민족통합을 통한 완전독립국가를 모색했다는 점, 민족과 인류의 현실을 고려하여 문화국가가 되기를 주장했다는 점 등에서 높이 평가받는다.[165] 1999년 한겨레21이 실시한 '20세기 정신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설문조사에서 백범은 가장 많은 사람이 꼽은 인물이었다. "사상가라기보다 정치지도자에 가까운 백범은 역사 속에서 민족자주를 위한 실천을 치열하게 전개한 점에서, 많은 응답자들로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정화"라는 평가를 받았다.[166] 1946년김일성을 살해하려 할 만큼 극단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167][168]

비판[]

강준만도진순은 각각 김구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기 정체감이 약하였으며, 유학·동학·불교·기독교 등을 두루 편력하는 사상적 방황을 경험하긴 했지만 전통적 가치인 유학적 또는 의병적 신의를 중시하는 완고함을 지닌 행동지향형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였다.[155][169]

최상천은 김구가 점령국가의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대책없이 반탁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허송세월을 했다고 비판하였다.[170]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지은 이영훈 교수는 "김구는 독립운동에 족적을 남겼지만 ‘민족’만 주창했을 뿐 건국에 대한 비전은 없었다"고 하면서 그가 건국에 반대한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171]

강준만은 그가 무분별한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했다고 보았다. 1945년의 4개월 동안 해방 국면에서의 반공주의한국의 대중들에게 아직 깊이 침투되지 못하였다. 김구의 격렬한 반탁은 모든 반대세력에게 의도하지 않았지만 국수주의민족주의라는 예기치 않은 정당성을 얹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172]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박정희 정부가 이승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추앙했으며 김구는 '해방 정국에서 미아가 된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173] 14대 대통령 김영삼은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을 상상한 정치감각이 떨어지는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174]

김구를 연기한 배우들[]

드라마[]

  • 이영후 - 1981년 (제1공화국) MBC 드라마
  • 김상중 - 1995년 (그날이 오면, 청년 김구) KBS 드라마
  • 조상건 - 1995년 (그날이 오면, 장년 김구) KBS 드라마
  • 이영후 - 1998년 (삼김시대) SBS 드라마
  • 이영후 - 2003년 (야인시대) SBS 드라마
  • 이영후 - 2006년 (서울 1945) KBS 드라마

영화[]

  • 전창근 - 1960년 (아! 백범김구선생)[175]
  • 박암 - 1973년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

참고 자료[]

  • 김구, 《백범일지》(국사원, 1947)
  •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 편, 《백범김구전집 1권~13권》(대한매일신보사, 1999)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비운의 역사 현장 아! 경교장》(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편,2003)
  • 김제방, 《이승만과 김구의 대좌》 (한솜, 2005년)
  • 《백범어록(평화통일의 첫걸음, 백범의 마지막 말과 글)》(도진순 역, 돌베개, 2007)
  • 브루스 커밍스, 《일월총서 71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 김삼웅, 《백범 김구 평전》(시대의창, 2004)
  •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일조각, 1970)
  • 《고하송진우선생전》(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 동아일보출판국, 1964)
  • 《백범 김구선생의 편지- 백범학술원총서》(나남출판 편집부 지음, 나남출판, 2005)
  • 《도왜실기》(엄항섭 역, 범우사, 2002)
  • 《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박갑동, 계명사, 1998)
  • 《위대한 한국인 제9권 김구 편》(선우진, 휘문출판사, 1976년)
  • 《위대한 한국인 제11권 이승만 편》(허정, 휘문출판사, 1976년)
  • 신용하, 《백범 김구의 사상과 독립운동》(신용하 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백범김구의정치사상》(정경환 저, 이경, 2008.02.28)
  • 《한국정당사》(한태수, 신태양사, 1965)
  • 《백범 평전》(정경환 저, 이경, 2007)
  • 교문사, 《백범 김구:생애와 사상》(편집부 저, 교문사, 1982.08.01)
  • 연시중, 《한국 정당정치 실록 1권》(항일 독립운동부터 김일성의 집권까지)(지와사랑, 2001.01.20)
  • 박태균,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지성사, 1996.11.01)
  •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 김학준, 《해방공간의 주역들》(동아일보사, 1996)
  • 김구, 《백범 김구선생 언론집 상, 하》(나남출판, 2004)
  • 문용린 외, 《백범 김구의 지적 계발과정 탐색-한 위인의 다중지능 분석보고서》 (문용린 외, 집문당. 2005)
  • 전정일, 《백범 김구 선생 살해범 안두희 그는 누구인가》(전정일 편저, 삼성서적, 1994)
  •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 한국사학회, 한국현대인물론 1,2(을유문화사, 1987)

함께 보기[]

틀:Col-begin 틀:Col-3

  • 한국독립당
  • 백범일지
  • 백범기념관
  • 대한민국임시정부
  • 구미위원부
  • 김규식
  • 박찬익
  • 이승만
  • 장제스
  • 안창호
  • 105인 사건
  • 이봉창
  • 윤봉길
  • 유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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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
  2.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514
  3. 김구, 《백범일지》(도진순 주해, 돌베개, 2006) 22페이지
  4. 4.0 4.1 4.2 4.3 백범김구기념사업회 - 연보
  5. 계몽사에서 발간한 어린이위인전기 《김구》편에도 김구선생이 어릴적 개구장이여서, 아버지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는데, 장난의 정도가 지나쳐서 친척 할아버지가 집에 데려가 며칠간 돌보아주면서 위로할 만큼 호되게 혼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6. 6.0 6.1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8) - 김구 그는 누구인가”. 주간조선. 
  7. 7.0 7.1 7.2 7.3 백범일지 상권 참조
  8. 8.0 8.1 8.2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9쪽 참조.
  9. 김구.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돌베개. 50~51쪽쪽. ISBN 8971991488. 
  10.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38쪽.
  11. 김구.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돌베개. 90~101쪽쪽. ISBN 8971991488. 
  12. 김구.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돌베개. 98쪽 각주59쪽. ISBN 8971991488. 
  13.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구가 재판을 받던 재판소 앞에 운집한 사람들은 아들의 재판을 보러 온 곽낙원 여사에게 '마님. 호랑이처럼 기개가 있는 아드님을 두셨으니 얼마나 좋으시겠습니까'라면서 일본 사람을 때려죽인 김구를 영웅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말해준다.
  14. 14.0 14.1 14.2 14.3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15.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0~251쪽 참조.
  16.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478b
  17.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478b
  18.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478b
  19. 19.0 19.1 19.2 19.3 김구.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돌베개. 267쪽쪽. ISBN 8971991488. 
  20. 백범김구기념사업회
  21. 김구.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돌베개. 440~441쪽쪽. ISBN 8971991488. 
  22. 1918년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쪽.
  23. 《백범일지(쉽게 읽는)》 (김구, 도진순 옮김, 돌베개, 2005.11) 211~212쪽.
  24. 《대한민국의 기원》 (이정식, 일조각, 2006) 407쪽.
  25. 25.0 25.1 25.2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26. 26.0 26.1 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view.asp?idx=1569&page=1&search_1=&search_2=김용원&search_3=&search_4=&search_5=출생지&search_6=내용&orderByName=&orderBy=
  27. 27.0 27.1 신우철. “‘연석회의’ 주장이 못미더운 이유”. 동아일보. 
  28.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29. 박노자.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한겨레21. 
  30. http://www.hani.co.kr/section-021109000/2007/04/021109000200704120655080.html
  31. 31.0 31.1 31.2 31.3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샘터사, 1979) 76
  32. 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4
  33. 33.0 33.1 《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이연복 지음, 국학자료원, 2006) 119페이지
  34. 34.0 34.1 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5
  35. 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5
  36. http://www.kimgu.or.kr/menu_2/index.html
  37. 한인애국단 조직시기는 1928년설도 있다.
  38.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편집부 지음 | 김승일 번역 | 시대의창출판사 | 2006-04-22) 399
  39. 39.0 39.1 <광복 60주년 특집> ③무명의 독립운동가들 연합뉴스 2005-08-10일자
  40.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63페이지
  41.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편집부 지음 | 김승일 번역 | 시대의창출판사 | 2006-04-22) 399
  42. 42.0 42.1 42.2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5쪽.
  43. 이근호, 《한국사 사전》 (이근호 편 지음, 청아출판사, 2006) 517쪽
  44. 44.0 44.1 하련생, 《선월》 (하련생 지음, 강영매 번역, 범우사, 2007) 521페이지
  45.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64페이지
  46. 46.0 46.1 46.2 46.3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6쪽.
  47.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1페이지
  48. 사상휘보 제14호(1938.3)(조선총독부고등법원사상부, 1938) 219~222
  49.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0페이지
  50. 50.0 50.1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2페이지
  51. 51.0 51.1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4페이지
  52.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65페이지
  53. 53.0 53.1 53.2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5페이지
  54. 이근호, 《한국사 사전》 (이근호 편 지음, 청아출판사, 2006) 517쪽
  55.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6페이지
  56.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강만길 저, 서해문집, 2008) 279, 330
  57. 백범학술원, 《백범과 민족운동연구 제1집 2003년》 (백범학술원, 2003) 195페이지
  58. 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6
  59. 일월총서 71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253~254쪽
  60.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역, 일월서각, 1986) 237
  61. 현대사를 바꾼 전쟁과 정치 : 전사를 통해 진단한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김동주, 뿌리출판사, 2004) 67 페이지
  62. 인물로보는 항일무장투쟁사(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역사비평사, 2006) 71페이지
  63.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59~263쪽.
  64. 안기석,〈백의사 총사령 염동진: 김일성, 간담 서늘케 한 전설적 백색 테러리스트〉(신동아) 2001년 10월, 316~323쪽.
  65. 65.0 65.1 [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조선일보 90년 ] 해방공간 지도자들, 이념 떠나 '복간 축하' 메시지 조선일보 2010.02.08일자
  66.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
  67.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
  68. 박용만,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86년 중판) 43페이지
  69. 69.0 69.1 일월총서 71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286
  70. 70.0 70.1 고하 송진우 선생전 69, 대한민국사 I 713~714
  71. 일월총서 71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287
  72.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역, 일월서각, 1986) 287
  73.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편집부 지음, 역사비평사, 2007) 166~170페이지
  74. 백범어록(김구, 도진순 엮고 보탬, 돌베게, 2007.11)의 67페이지
  75. 대한민국의 기원(이정식, 일조각, 2006) 142페이지
  76. 대한민국의 기원(이정식, 일조각, 2006) 143페이지
  77. 77.0 77.1 77.2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362페이지
  78. http://ref.daum.net/item/3990128
  79.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25
  80. 80.0 80.1 80.2 80.3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4~15쪽.
  81.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82.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편집부 지음, 역사비평사, 2007) 168페이지
  83. 83.0 83.1 83.2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편집부 지음, 역사비평사, 2007) 169페이지
  84. 위클리조선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85. 위클리조선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86.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23
  8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55쪽.
  88.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57쪽.
  89. 89.0 89.1 89.2 89.3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30
  90.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기원과 원인(박명림, 나남, 1996) 157~158
  91. 북한 50년사:우리가 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김학준, 동아출판사, 1995) 110
  92. 92.0 92.1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기원과 원인(박명림, 나남, 1996) 157
  93. 93.0 93.1 93.2 북한 50년사:우리가 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김학준, 동아출판사, 1995) 107
  94. 승차편의 공여에 관한 의뢰장과 임정 신임장
  95.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기원과 원인(박명림, 나남, 1996) 158
  96. 96.0 96.1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31
  97. 이철승·박갑동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 박갑동 공저, 계명사, 1998) 311
  98. 역사문제연구소, 《제주 4.3 연구》 (역사비평사, 2006) 213페이지
  99. 99.0 99.1 99.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3쪽.
  100. 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역사용어 바로쓰기》 (역사비평사, 2006) 171페이지
  101. 101.0 101.1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5쪽.
  10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30쪽.
  103.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편집부 지음, 역사비평사, 2007) 169페이지
  104.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32~33쪽
  105. 정해구, 《분단과 이승만:1945~1948》〈역사비평〉제32호 (1996년봄) 276쪽.
  10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32~33쪽
  10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34쪽
  108.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 김구 시대의 정치사》(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154쪽에서 재인용
  109.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1쪽
  110. 110.0 110.1 서중석, 《한국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 2006) 57쪽
  111. 111.0 111.1 111.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5쪽.
  112.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역사비평사, 1991) 545쪽
  113. 도진순, 《한국 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김구시대의 정치사》(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158쪽.
  114. 이철승·박갑동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 박갑동 공저, 계명사, 1998) 360페이지
  115. 115.0 115.1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6쪽.
  116. 박태균,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해방정국과 4인의 요인 암살, 배경과 진상》(지성사, 1994) 123~124쪽.
  11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7쪽.
  118. 박태균,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해방정국과 4인의 요인 암살, 배경과 진상》(지성사, 1994) 126쪽.
  119. 2001년 9월에 발굴되 공개된 미군 정보장교인 소령 조지 실리의 보고서는 장덕수의 암살범들이 백의사 단원으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했다. 1946년 하반기부터 김구는 신익희와 멀어지면서 신익희의 조직인 백의사와도 멀어졌지만 김구가 한때 백의사와 인연을 맺었던 건 사실이므로 김구는 미군정에 의해 이래저래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몰리게 됐다. (이상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7쪽)
  120. 120.0 120.1 120.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7~68쪽.
  121. 121.0 121.1 121.2 121.3 121.4 121.5 121.6 121.7 121.8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7쪽.
  12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95쪽
  123. 123.0 123.1 123.2 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역사용어 바로쓰기》 (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역사비평사, 2006) 172페이지
  124.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김학준 지음| 민음사 펴냄 | 2007-10-08) p288
  125.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김학준 지음| 민음사 펴냄 | 2007-10-08) p289
  126. (동아광장/윤평중)민족은 主義를 초월하는가 동아일보 2007년 10월 03일자
  127.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376
  128.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112페이지
  129.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김학준 지음| 민음사 펴냄 | 2007-10-08) p289
  130. 이철승·박갑동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 박갑동 공저, 계명사, 1998) 369페이지
  131. 이철승·박갑동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 박갑동 공저, 계명사, 1998) 367
  132. 132.0 132.1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6) 23페이지
  133. 133.0 133.1 기념사업회 연보7
  134. 134.0 134.1 사진연보
  135. 135.0 135.1 135.2 [경마 이야기] 김구-이승만 이후 정치인 발길 끊겨 조선일보 1999.06.02
  136.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1996) 60페이지
  137. 137.0 137.1 137.2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514페이지
  138. 138.0 138.1 138.2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515페이지
  139. 1등신문 대전일보 59년 정통언론
  140. 한은 10만원권 발행 백지화 디지털타임스 2009-01-22자
  141.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142.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143. 한화(2)-동생 김호연 빙그레회장家 서울신문 2005-08-29 14면
  144.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60쪽.
  145.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21
  146. 백범어록 도진순 63페이지
  14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3쪽.
  148.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김구시대의 정치사》(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146~147쪽.
  149. 149.0 149.1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06쪽.
  150.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54~255쪽.
  151. 역사문제연구소 《제주 4.3 연구》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역사비평사, 2006) 213페이지
  152.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146~147쪽.
  153.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0~61쪽
  154.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55. 155.0 155.1 155.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68쪽
  156. 백범 김구 비서 선우진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푸른역사, 2008) 74페이지
  157.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99~300쪽.
  158.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43권, 208~209쪽, 〈백찬기심문조서(제5회)〉
  159. 이철승·박갑동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계명사, 1998) 148쪽
  160. 아들은 없고 딸만 있었다 한다.
  161. 안중근 청년아카데미
  162. 백범의 혜안으로 '문화국가' 이룰터... 기독교타임즈
  163. 163.0 163.1 163.2 163.3 163.4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26~228쪽 참조.
  164. 박용만,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86년 중판) 35페이지
  165. 선진문화를 이끄는 힘 ‘장비의 발전.
  166. 김구, 안창호, 신채호…김일성! 전국의 인문·사회계열 교수가 뽑은 ‘20세기 한국의 정신사에 영향을 낀친 인물 10인’, 한겨레21 1999년 03월 25일 제250호
  16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57쪽
  168.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II:기원과 원인》(나남, 1996) 149쪽
  169. 도진순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도진순, 당대, 2001) 262~263쪽
  170.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58쪽
  171.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책임편집 이영훈 교수 인터뷰.
  17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35쪽
  173. <연합초대석> 이승만 초대대통령 아들 이인수 박사.
  174. http://weekly.hankooki.com/lpage/column/200801/wk2008012604115737660.htm
  175.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1001001&article_id=54445
전 임
노백린
제10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대리)
1923년 4월 9일 - 1924년 4월 23일
후 임
 이동녕
 
전 임
홍진
제9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1926년 12월 14일 - 1927년 8월
후 임
 김구 
전 임
김구
제10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1927년 4월 10일 - 1927년 8월
후 임
 이동녕 
전 임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1930년 8월 4일 - 1933년 10월
후 임
 양기탁 
전 임
이동녕
제16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1940년 3월 - 1944년 4월
후 임
 김구 
전 임
김구
제17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1944년 4월 - 1948년 8월 15일
후 임
 이승만 
전 임
?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1919년 9월 - 1921년 5월
후 임
 김용원 
전 임
'
한국 광복군 통수부 주석
(광복군 최고사령관)
1944년 10월 - 1946년 1월 15일
후 임
 원용덕
(남조선국방경비대 수립)
 

틀:1995년-이 달의 독립 운동가 틀:1995년-이 달의 문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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