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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金奎植, 1881년 1월 29일[1] ~ 1950년 12월 10일)은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가, 정치가, 학자이다.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 경신학교의 교수 등을 지내고 미국에 유학하였다. 만주에서 대한독립군단의 지휘관으로도 활약하였고, 1919년부터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파리위원장, 구미외교위원장, 외무총장, 학무총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0년 임시정부의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는 창조파의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 뒤 임정을 떠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노력과 교육활동 등을 하다가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고 당 주석직에 올랐으며, 1940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광복 후에는 신탁통치반대운동과 좌우합작운동에 앞장섰다. 1948년 남한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김구와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남북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정계를 떠났다.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이다. 본관은 청풍. 경상남도 동래군 출신이나 강원도 홍천군 출신으로도 간주된다.[2] 별칭으로는 변갑이라는 이름도 있었다.[3]

생애[]

출생 및 성장[]

중방파(仲房派) 23세손으로 1881년 1월 29일[1] 경상남도 동래부의 관리 아버지 김지성(金智性)과 어머니 경주이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4][5]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이정식 교수의 고증에 의하면 妾子라 한다.) 아버지 김지성은 인텔리로 일본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개항 이후에는 외무관리로 러시아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왔으며[4] 당시 동래부사의 부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 나라에 파견된 청나라위안스카이(袁世凱)가 내정간섭을 단행하자, 일본과의 불평등한 교역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여 민씨정권의 대일무역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빌미가 되어 유배를 당하고.[4], 어머니마저 6세 때 죽었기 때문에 숙부들의 집에 맡겨졌으나 친척들도 생활형편이 어려웠다. 고아로 지내다가 1886년 5월 미국 북장로파의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의 고아원에서 보내졌다. 언더우드는 내한후 1년뒤 고종의 호의로 승인을 얻고 고아원을 설립했으며 처음에는 직원수가 부족하여 언더우드가 직접 고아원을 관리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3] 유아를 맡기 힘든 언더우드의 고아원은 다시 김규식을 그의 일가에게로 돌려보냈다.[6] 열병에 걸려 치료도 못받고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7] 김순애에 의하면 그는 위장병이 심했고 오랫동안 간질병에 시달렸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8] 그러나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기도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너무 굶주린채 방치되었던 김규식은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 삼키고 있었다.[3] 언더우드는 그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어려운 입장이었으나 그를 고아원으로 데려가고자 노력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아이가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하면서, 언더우드의 그러한 행동을 말렸다.[3] 그러나 언더우드 목사는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김규식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언더우드는 간질과 위장병과 굶주림으로 쇠약해진 그를 돌보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아이를 극진히 간호했다. 간질과 위장병을 심하게 앓던 그는 언더우드의 지극정성과 간호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게 되었다.[3] 이후 언더우드의 집에서 그가 세운 학당을 다니며 소년기를 보냈다.[6][9] 11살 때는 부친마저 여의었다.[4]

독립운동[]

청년기 활동[]

언더우드의 세심한 배려와 지원으로 김규식은 서양문물과 근대교육을 폭넓게 접할 수 있었다.[3] 언더우드의 배려로 언더우드가 세운 사립학당인 예수교학당 혹은 민노아학당으로도 불리던 언더우드 학당에 입학하였다. 이후 신앙활동에도 투신하여 그는 한국인 교역자들 중에서 가장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의 하나로 인정을 받으며 성장하였다.[3] 1895년 언더우드 학당을 마치고 김규식은 서재필이 경영하는 〈독립신문〉에 잠시 근무하다가, 서재필 등의 권유와 언더우드의 후원을 받아 1896년 미국에 건너갔다. 1896년부터 1897년부터 미국 버지니아 주의 목가적인 환경에서 공부하게 되었다.[10] 1897년 가을 버지니아 주에 있는 루터교계 인문대학 로노크 대학교의 대학 준비과정(예비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10] 1898년 가을 정식으로 로노크 대학교에 입학, 1903년까지 로노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11] 이후 언더우드의 지원과 함께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1900년 5월에는 학교 잡지에 한국어에 대한 논문을 실었고, 1902년 2월호에는 동방의 아침이라는 이름으로 연설논문이 실리기도 했다.[11] 한편 한국어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할 때는 한국어와 영어, 불어, 독일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와도 비교하면서 쓴 글이라 한다.[11] 이정식은 그만한 글을 발견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며 찬탄하기도 하였다.[11] 1901년 1월에 개최된 연설 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대학 잡지에 특집으로 실리기도 했다.[11] 로노크 대학교 재학 당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등에 뛰어났고 웅변부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데모스테니언 문학회 라는 문학클럽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02년 1월 문학 동호회의 회장이 되었다.[11]학창시절의 학력 평점은 92.2점을 유지하였으며 1903년 6월 로노크 대학을 졸업하였다.[11] 1903년 5월에는 로노크 대학 잡지에 《러시아와 한국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였는데, 이 글에서 '한국의 정부는 천하고 무능력하며 정직하지 못한 정치가들의 정부이며 한국은 음모와 역 음모, 타성과 보수주의에 잠겨 있고 나라는 반역자들과 겁쟁이들로 가득차있다'고 비판하였다.[12] 대안으로 '한국이 지금이라도 깨어난다면 머지않아 드리워질 침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며 한탄하기도 하였다.[12] 졸업식 당시 졸업 기념 연사 4인 중의 1인으로 선발되어 '러시아와 극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의 러시아 침략과 러일전쟁의 결과를 예견, 분석하였다.[12]

1903년 가을 그는 미국 뉴욕 주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 1904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장학생으로 선발하고 학비를 지원한다 하였으나 그는 '고국의 독립을 위해서' 라며 거절하고 귀국하였다. 1905년 8월 미국 포츠머드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중화민국 상하이까지 갔으나 실패하고 돌아왔고[12], 그해 만주의 뤼순 항구가 일본에 함락되자 로노크 대학의 잡지에 여순항의 함락을 크리미아 전쟁에서의 세바스토폴의 함락과 비교한 '근대 세바스토폴의 함락'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12] 1906년 5월에는 한양 조씨 전 군수 조순환(趙淳煥)의 무남독녀인 조은수(趙恩受, 당시 16세)와 결혼하였다.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의 비서로 있으면서 YMCA학교 간사 및 교사, 경신학교 학감, 배재전문학교 영어강사, 연희전문학교 강사, 조선기독교 대학 교수 등을 지냈다.

종교 활동으로는 1910년에 새문안교회의 장로가 되었으며, 1911년 12월 경기·충청도장로교 연합회 서기로 뽑혔고, 1912년 2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 이후로 일본의 교회탄압이 시작되자,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왜놈들이 하도 못살게 굴어서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보기로 했다'고 표현하였다.[13]

독립자금 모금활동[]

1914년부터 2년간 화북몽고 지방에서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며 동제사에 가입하였고[14] 신채호·홍명희·서병호(1885~1972) 등과 친분관계를 맺었다. 1914년 1월 독립자금을 모금하러 변복하고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신의주에 갔다가 일본경찰의 검거를 피해 되돌아가야 했다. 그해 가을 독립군단을 양성할 목적으로 류동렬, 이태준과 청년들을 이끌고 몽골울란바토르로 건너갔다. 그러나 자금이 조달되지 않았고 이태준은 병사하여 항일군대 결성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1916년에 앤더슨&마이어회사(Anderson & Meyer Company)에 입사하여 몽골 접경의 장가구에서 2년간 근무했으며, 1918년 3월에는 외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있는 앤더슨&마이어회사 울란바토르 지점장으로 부임했다. 1917년 조은수 여사와 사별하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활동[]

정치 및 외교활동[]

1918년 여운형 등의 초청으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왔고, 신한청년당 창립에 참가하였다. 이후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 대표단의 수석 대표로 임명하고[15]

프랑스로 파견하였다.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제출하고 《한국 민족의 주장》·《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인쇄물을 출간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침략상과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널리 홍보했다.[15] 이는 우드로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기대한 것이었다. 김규식은 재혼후 보름만에 김탕, 여운홍 등 대표단을 이끌고 프랑스로 출국하였다.[15]

출국 전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틀:인용문 라며 독립시위를 벌일 것을 주문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다가 거절당하면서, 회의 참석대상은 정부의 자격이어야만 참가할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해 왔다. 이어 1919년 4월 상하이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파리 현지에서 외무총장에 선출되었다.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탐문에도 계속해서 홍보책자 등을 인쇄하여 돌리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였으나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자 실망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 되었으며 독립공채표를 작성, 이승만과 공동명의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상하이에 보내는 일을 하였다. 9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구미외교위원부가 개편되면서 그는 부위원장으로 물러났다.

1919년 미국체류 중 뇌의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그 뒤로 간질병이 나타나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16] 이후 상하이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일을 하다가 1920년 상하이에 귀환하여 임시정부 학무총장 등에 선임되었다. 중국에 도착한 후 영친왕의 비로 간택되었다가 파혼당한 민갑완(閔甲完)의 일족이 중국 상하이로 건너오자 김규식은 이들의 생활비를 지원하였다. 김규식은 상하이 현지에 미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의 간부를 설득하여 민갑완을 입학시켜 공부하게 하였다.[17] 그러나 신학문 공부에 한창 재미 들일 무렵, 일본영사의 압력으로 민갑완은 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17] 김규식은 민갑완에게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민갑완은 '나 하나의 희생으로 만사가 평온하기를 바랄 뿐'이라며 그의 권고를 거절하였다.[17]

1921년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상설기구를 창설하고, 1923년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었을 때는 여운형, 서병호 등과 더불어 창조파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다시 소비에트 연방모스크바를 방문,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 노력자대회에 참석했다.[4] 회의에서 그는 여운형 등과 함께 참석하여 5인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개회사를 발표하고 대회가 끝난 후에는 레닌을 만나 면담하였다.[4] 이때 그는 일본의 침략이 중국 대륙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하는 내용의 논문인 '아시아의 혁명운동과 제국주의'를 영어로 써서 한·중 양국 인민이 연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4] 1924년 8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1925년 소련은 카라한(Lev. M. Karakhan) 외상을 일본 외무상 방택겸길(芳澤謙吉)에게 보내 일본과 밀약을 맺고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을 축출, 체포할 것을 협약하여 소련공산당의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는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을 축출했는데, 원세훈, 조완구 등이 포함돼 있었다.[18] 김규식도 이때 소련정부로부터 강제로 축출되었다.[18] 1927년에 동방 피압박 민족 대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을 창간하였다.

민족정당 통합 노력[]

1932년 겨울 '중·한 민중대동맹', 대일전선통일연맹 등을 결성, 조직하였으며 이후 항일독립을 위해 민족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다. 1934년 최동오, 김두봉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의 단결과 규합을 부르짖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조직, 발기하였다.[19] 193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으며, 1935년 6월 난징으로 지청천 등 민족정당 지도자를 소집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당, 조직하여 그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0년 민족유일당 운동의 확장으로 김구와 협의하였으나 유일당은 실패하고 대신 항일 공동연합전선 설립을 결정하여 임시정부에 입각, 1940년 임시정부 부주석, 194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선전부장을 지냈다. 194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부주석 취임 이후 그는 국민당정부와 협의하며 임시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4]

건국 활동[]

해방후 정치활동[]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외무부장에 선임되었다. [20] 그러나 취임을 거절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때 김구 등과 함께 임정 1진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초 기자들이 무슨 병을 앓고 있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내가 무슨 병을 앓고 있느냐를 묻지 말고 내가 앓고 있지 않는 병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하였다.[16]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가 결정되자 결정문을 즉시 입수하여 국민에게 발표하고 즉각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뒤 김규식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을 신중하게 검토하였으며, 그 내용이 현실적으로 남북이 미소에 의해서 분할 점령되어 있는 상태에서 결코 우리에게 불리한 내용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자 그는 반탁운동으로부터 이탈하였다. 그러나 반탁운동에서 탈퇴하였다고 하여 모스크바 3상 협정의 내용을 찬성하는 좌파들의 조직에도 가담하지는 않았다.[21] 그러나 찬탁으로 전환하면서 김규식을 암살하려는 단체가 비밀리에 조직되기도 하였다.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비상정치회의 주비회 통합체)에서 최고정무위원직(총 28명)에 선출되었다. 또한 미군정청의 존 하지 장군은 이승만 박사의 동의를 얻어 김규식을 좌우합작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하였으며,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이 되었다.[22] 1946년 2월 14일 민족혁명당 당수직을 사퇴하고 탈당하였으며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진행하였다. 6월 10일 민주일보(民主日報) 창간때 명예사장에 추대되었다.[23]

좌우합작운동의 실패[]

1946년 5월 김규식은 원세훈여운형을 찾아가 좌우합작을 시도하였고 여운형이 이를 승낙함으로서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되었다. 1946년 7월 3일 김규식은 친일파 처단을 요구하다가 안재홍과 함께 용공분자로 모는 삐라가 나돌고 벽보가 붙기도 했다. 기독연맹 모임에서 김구의 연설에 이어 김규식이 연설을 하였을 때 참석자들이 모두 귀를 막아 김규식은 퇴장하였다. 거리에는 그들을 공격하는 내용이 잔뜩 담긴 전단이 살포되고 벽보가 나붙었다. 전단이 뿌려진 그날 괴청년들은 김규식의 집을 둘러싸고 김규식과 안재홍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안재홍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반탁, 반과도입법위원의 내용을 담은 전단을 살포하였다.[24]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12월 12일 과도입법의원에서 위원장에 선출되었다.[22] 과도입법의원은 각 리단위 대표자가 읍면 단위 대표자를 선발하고 읍면 대표자는 군단위, 군단위 대표자는 도단위, 도단위 대표자가 최종 선발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과도입법의원을 통해 좌우합작을 모색하였으나 여운형 일파와 장택상 일파가 과도입법의원 참가를 거부하여 처음부터 난항했다. 또한 과도입법위원회 선거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된 한민당 일파를 낙선시켰다 한다. 좌우합작에 적극 참여하는 그의 포용적인 자세를 높이 평가한 미 군정측은 이승만이나 김구 대신 그를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세울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3]

1947년 1월 20일 과도입법의원에서 이승만 진영과 한민당계인사들이 반탁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수적으로 불리하여 김규식은 손을 쓸 수 없었다. 입법의원 회의장에는 우익 청년단체 회원들이 진입해 장덕수, 장택상 등의 지휘 아래 반대파들에게 야유를 보내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고 반탁결의가 통과되었다. 반탁결의안의 통과로 김규식의 위신은 크게 실추당했다.[25]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이 지배하는 입법의원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수 없다며 시골로 내려갔다.[25]

1947년 2월 14일에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26] 이승만을 견제할 목적으로 미군정청장 존 하지미국에 있던 서재필을 군정 고문관으로 초빙하려 하자 김규식 역시 서재필의 귀국을 원하였다.[27] 7월 여운형이 괴한에게 피습 절명하자 원세훈, 조소앙, 안재홍, 여운홍 등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12월 5일 좌우합작운동을 포기하고 말았다. 1947년 10월 1일 민족자주연맹 결성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28] 1947년 12월 20일 민족자주연맹의 의장에 선임되었다.[28] [29] 결성식에서 그는 극좌-극우를 반대하고 민족주체성을 찾자고 역설하였다.[28]

김규식은 자신이 머무르는 삼청장 안에서도 침실을 자주 옮겨다니기까지 했으며, 측근들은 만일의 테러 사태를 염려해 강원도 홍천에 있는 선친의 묘소에 참배를 가는 것도 만류하였다.[30][31]

남북협상과 최후[]

1947년말 다시 민족자주연맹과 중도파를 규합하여 남북협상을 추진하였다. 1947년 11월 김규식은 남북지도자회의 소집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32] 12월 발생한 장덕수 사건으로 이승만계열과 완전히 틀어진 김구계열이 합류하면서 김구의 협력을 얻어냈다. 김규식의 남북협상 1948년 1월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주장하였다. 이후 김구와 함께 북행길을 결심하여 1948년 2월 16일 북한김두봉에게 서신을 보내 남북 지도자 회담을 제안하였다.[21] 김구1948년 4월 10일 북조선으로 갔고, 김규식 일행은 4월 21일 남북연석회의가 열리는 북조선으로 갔다. 남한의 주요 정치인사들은 북행하였으나 연석회의에는 불참하였다. 이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낌새를 눈치챈 김구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간단한 인사말을 했을 뿐이다. 4월 22일 평양시내에 도착한 김규식은 병을 이유로 한 번도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33]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구,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4김 회동'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 김일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48년 5월 5일 김구와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34] 그러나 성과없이 돌아온 이들은 5월 14일 북조선측의 제2차 남북협상 제의를 거절하고, 5월 21일 김구와 함께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하여 5·30남한단독총선거에는 ‘불반대·불참가’의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건국기초작업에 대한 그의 정치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되었다. 김구의 장례를 놓고 정부와 장례위원회의 갈등이 발생하였다. 김구의 장례는 7월 5일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정부 측이 국장을 제의하자 장례위원회 측이 너희들이 죽여 놓고선 무슨 국장이냐?며 반발하며 민족장을 추진하려고 했다. 결국 김규식이 양자의 의견을 조정, 조율하여 국장과 민족장을 합친 국민장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35]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 총선거가 예정되자 김규식의 지지자들은 그의 총선 참여를 권유하였으나 2대 총선에도 불반대 불참가 성명을 발표하였다. 6월 김규식은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으며, 만포진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틀:출처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91년 11월 21일 광복회는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선열제단에 그의 위패를 모셨다.[4]

평가[]

당대의 여론[]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5%가 김규식을 지목하였다.[36]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52표를 얻었다.[36]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694표로 전체의 10.3%를 확보했다 한다.[36]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89표로 4위를 하였다.[36]

1990년대 이후의 평가[]

평가[]

남북협상에 실패한 후 납북되어 잊혀졌다가 2000년대 이후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37] 2000년 8월 김규식의 생애와 사상 5권이 출간되었으며[37], 그 해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부산대학교 교수 이철순는 "명분에만 집착한 정치가가 아니라 북한 김일성 정권에는 의심을 가지고 신중하게 접근했고 정세에 따라서는 현실에 적합한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김규식은 이상주의 일변도의 정치가가 아니라 현실주의적 측면도 있는 정치가로 본다"고 밝혔다. [38] 1921~1922년 모스크바에 갔을 때 그와 동행했던 나용균에 의하면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어학에 능통했으며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깨끗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39]

비판[]

나용균에 의하면 약간 편협한 편이었다고 평하였다.[39] 한편 김준연은 그가 배짱이 없었고 마음이 약했다고 보았다.[39] 윤보선은 그가 한번 적이 되면 영원한 적이 된다고도 평하였다.[39] 강원용은 그가 직선적이고 날카롭고 냉정했다고 보았다.[39] 여운홍은 그가 성격이 급했고 고집이 세고 집착이 강하다고 평하였다. 그런가 하면 배짱이 없었다. 이승만의 배짱의 10분의 1만 가졌더라면 하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39]

기타[]

김규식의 비서로 있었던 송남헌에 의하면 이상주의자라고 평가하였다. 강원룡은 그가 직선적이고 날카로웠으며 냉정하고 세심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통찰력이 있고 지식이 풍부하였지만 비관적이었다고도 보았다.[40] 한편 둘째아들 김진동은 그가 규율에 엄격한 사람이었으나 모순투성이었다고 평하였다.[40]

2008년 1월 경기도 이천시의 이천 냉동창고 화재로 사망한 중국인 김군은 그와는 동명이인으로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규식의 후손으로 알려졌다.[41][42][43]

저서[]

  • 시집, 양자강의 유혹(揚子幽景)
  • 영작법
  • 엘리자베드시대의 연극입문
  • 번역, 원용사(婉容詞)의 영문번역

유족[]

그의 부인 김순애(金淳愛) 도 독립운동가였다. 귀국후 교육사업을 하였으며 정신여자고등학교의 재단 이사장다. 둘째 아들 김진동, 딸 김우애는 미국에서 살다가 사망하였다. 셋째 아들 김진세씨는 미국 텍사스 샌안토니오에 살고 있다. [44]


  • 아버지 : 김지성(金智性)
  • 어머니 : 경주이씨
    • 형 : 김규찬(백부 김우성의 양자로 감)
    • 형 :
  • 부인 : 조은수(趙恩受, 1890년 ~ 1917년)
    • 아들 : 김진필(1910년 ~ 1910년)
    • 아들 : 김진동(金鎭東), 독립운동가(1912년 ~ 1997년)
  • 부인 : 김순애(金淳愛, 1889년 음력 5월 12일 ~ 1976년 5월 17일), 독립운동가
    • 아들 : 김진세(金鎭世)
    • 딸 : 김한애(1923년~1930년)
    • 딸 : 김민애(1924년~1927년)
    • 딸 : 김우애(金尤愛, ?~2001년 1월 미국에서 사망)
  • 백부 : 김우성

김규식을 연기한 배우들[]

같이 보기[]

참고 자료[]

  • 이정식, 《김규식의 생애(신구문고 13) 》 (신구문화사, 1974)
  • 강만길 외,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1세트 전5권)》 (한울, 2000)
  • 이명화, 《김규식의 생애와 민족운동》(독립기념관, 1992)
  • 우사연구회, 《우사 김규식 통일ㆍ독립의 길 가다 1·2》(우사연구회 지음, 논형, 2007)
  • 우사연구회, 《우사 김규식 전집》(전5권)(우사연구회, 한울, 2000)
  • 송남헌, 《송남헌 회고록(김규식과 함께한 길)》 (심지연, 한울(한울아카데미), 2000)
  • 김규식, 《양자유경 (전승을 기념하여)》(The)lure of the Yangtze) (황건 역, 한울, 2000)
  • 서중석, 《남북협상-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 (한울, 2000)

주석[]

  1. 1.0 1.1 1880년 12월 28일생이라는 견해도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426692
  2. KBS방송 인물현대사 김규식편 방송내용 참고
  3. 3.0 3.1 3.2 3.3 3.4 3.5 3.6 3.7 [허명섭 칼럼]김규식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만남 크리스찬투데이
  4. 4.0 4.1 4.2 4.3 4.4 4.5 4.6 4.7 4.8 위클리조선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5. 한영우 《한국사 인물 열전 3(63인의 역사학자 쓴)》(한영우, 돌베개, 2007) 263페이지
  6. 6.0 6.1 [허명섭 칼럼]김규식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만남 :: 1등 기독교신문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 Today
  7.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1쪽 참조.
  8.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33쪽 참조.
  9. 갓피아 사랑이야기
  10. 10.0 10.1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3쪽 참조.
  11. 11.0 11.1 11.2 11.3 11.4 11.5 11.6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4쪽 참조.
  12. 12.0 12.1 12.2 12.3 12.4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5쪽 참조.
  13.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6쪽 참조.
  14. http://www.ccdailynews.com/up_file/pdf/20080423/2008042301-01011201.pdf
  15. 15.0 15.1 15.2 1919년 1월~: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쪽.
  16. 16.0 16.1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3쪽 참조.
  17. 17.0 17.1 17.2 영친왕의 약혼녀 민갑완 한겨레신문 1997년07월31일자 기사
  18. 18.0 18.1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58페이지
  19.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64페이지
  20. 허은, 〈8·15직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강만길 외,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역사비평사,2000)307~308쪽.
  21. 21.0 21.1 웹진 민족화해 > 통일의 발자취 > 우사 김규식, 민족주의자인가! 미국식합리주의자인가!
  22. 22.0 22.1 이정식, 구한말의 개혁, 독립투사 서재필 363-364쪽, 2003년 서울대학교 출판부
  23. '민주일보' - 네이트 백과사전
  24.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46~47쪽
  25. 25.0 25.1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3~14쪽
  26. 1946년 2월 13일~: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206쪽
  2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43쪽
  28. 28.0 28.1 28.2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민음사, 2007) 173페이지
  29.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역사비평사, 1991),545쪽.
  30.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52쪽
  31. 김재명, 《김규식:한 온건 지식인의 실패한 이상주의》〈한국현대사의 비극-중간파의 이상과 좌절〉(선인, 2003) 331쪽
  32. 서중석, 《한국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06) 57쪽.
  33. (동아광장/윤평중)민족은 主義를 초월하는가 동아일보 2007년 10월 03일자
  34. 1948년 4월 21일~서울로 돌아왔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15~118쪽.
  35.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53쪽
  36. 36.0 36.1 36.2 36.3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26~228쪽 참조.
  37. 37.0 37.1 尤史선생기념사업회 이안성 초대회장 - munhwa.com
  38. "이승만 초기 - 知美, 광복후 - 用美", 코나스넷
  39. 39.0 39.1 39.2 39.3 39.4 39.5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32~233쪽 참조.
  40. 40.0 40.1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33~234쪽 참조.
  41. 희생 中동포에 ‘독립군 후손’도 있었다 경향신문 2008-01-09일자
  42. 이천 화재로 숨진 김군씨는 독립운동가 후손(종합2보) 연합뉴스 2008-01-09일자
  43. 이천 화재 참사, 유가족 안타까운 사연들 한국일보 2008/01/09일자
  44. 신념(信念)의 사람 우사 김규식, 이승종

바깥 고리[]

전 임
초대
제1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1919년 8월 - 1919년 9월
후 임
 이승만 
전 임
초대
제1,2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1940년 - 1948년 8월 15일
후 임
 이시영
(대한민국 부통령)
 
전 임
-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장
1942년 - 1944년
후 임
 엄항섭 
전 임
초대
제1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위원장
1946년 12월 12일 - 1947년 6월 3일
후 임
 신익희 

틀:무오 독립선언 민족대표 39인 틀:2000년-이 달의 독립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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