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 1926년 1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으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전남 신안 하의도에서 태어나 제5대 민의원과 제6·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오랫동안 독재에 항거한 민주투사로 이름이 높아 ‘아시아의 만델라’로 불렸으며, 인권 향상과 남북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호는 후광(後廣)이며, ‘인동초’(忍冬草)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연설에 능하며, 대한민국 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약력과 평가[]
정치 입문 이전[]
1924년 하의도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1936년 목포로 이사를 했고 목포제일보통학교를 거쳐 1943년에 목포상고를 졸업했다.
정치 입문[]
졸업 후 목포일보 사장을 역임하고 해운업을 하던 그는 1954년 목포에서 무소속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낙선 이후, 해운회사를 처분하고 서울에 상경한 김대중은 잡지 《태양》을 발행하였고 웅변학원을 하기도 하였고, 1955년 10월에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사상계》에 노동문제에 관한 글을 기고[1]하는 등, 정계 진출을 준비하던 그는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장면 저격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김대중은 중앙 정계로 진출하게 되었다. 장면을 통해 민주당에 입당한 김대중은 이후 민주당의 당직을 거쳤다.
신민당 시절[]
1967년 2월에 신민당이 창당에 참여해, 신민당 정무위원 겸 대변인으로 취임했다. 이후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김대중은, 곧 1971년 4월 27일의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540만 표를 얻어 상대후보였던 박정희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이후 1971년 5월 25일의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로 당선된 김대중은 이듬해인 1972년 10월에 일본에 체류하던 중,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1973년 8월 8일에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면서 강제로 귀국당한 김대중은, 이후 자택에 연금되면서 정치활동이 금지당했다. 이후 1976년 3월 1일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했다가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이듬해의 대법원 판결에서 징역 5년 및 자격정지 5년형이 확정 선고되었다가, 1978년 12월 27일에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어 가택에 연금되었다.
1979년 3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결성했으며, 10·26 사건이 일어나면서 긴급조치와 가택연금이 해제되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이후[]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세계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들의 구명운동으로 1981년 1월 23일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82년에 형집행이 정지되면서 미국으로 망명했다.
1983년에 미국에서 재미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해 미주 지역에서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기울이다, 1985년 2월 8일에 귀국하여 가택에 연금되었다. 1985년에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두 차례의 대선에서의 낙선과 정계 은퇴[]
1987년 11월 12일,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표 겸 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김대중은 이후 야당 후보였던 김영삼과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채 1987년 12월 16일의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611만 표를 얻고 낙선했다.
1991년 4월 15일에 신민주연합당을 창설하여 총재로 선출되었고, 곧 이기택이 총재로 있던 민주당과 합당하여 통합 민주당을 출범시켰다. 이어 1992년 5월 15일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제14대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12월 18일의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지만 804만 표를 얻어 190만 표 차로 낙선하고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김대중은 1992년 12월 19일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1993년 1월에 영국으로 출국하여 케임브리지대 객원교수로 활동하다가 1993년 7월 귀국하였다.
정계 복귀와 대통령 당선[]
1995년에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어 1997년 10월에는 자민련의 총재였던 김종필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고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1033만 표를 획득해 당선되었다.
대통령 재임[]
1998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이후 2000년 6월 15일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해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1998년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선편을 통한 금강산 관광 사업이 시작되었다. 현대아산이 대북 사업의 중심에 섰지만, 불법적인 외환 송금은 문제가 되기도 했다.
2000년에는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간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한국의 인권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를 두고 야당에서는 노벨상 로비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김대중 노벨상 수상을 저지하기 위해 야당 의원들이 노르웨이를 방문하는 일이 벌어졌으며, 후에 군나르 베르게 노벨위원회 위원장이 한국에서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을 반대하는 편지 수천통이 전달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 말기 최규선은 국정원을 중심으로 한 노벨상 수상 프로젝트가 있었다고 폭로했지만, 실제로 노벨상 수상을 위해 탈법적인 행위가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로 밝혀진 바 없다.
집권 이후, 전임 김영삼 정부에서 발생한 IMF 사태를 맞아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IMF 구제 금융을 받는 대가로 강도 높은 기업 구조조정 실시를 요구받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 수준의 기업 투명성 강화와 부채비율 축소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시기에는 벤처기업 육성 지원에 힘썼다. 벤처산업이 성장하는데 도움은 주었지만, 윤태식 사건 등의 벤처산업과 관련된 비리가 발생해 비판받기도 한다. 또한 소비 활성화와 내수진작 정책을 펼쳤지만, 신용카드 산업의 무분별한 확장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해 그 후에 카드대란 사태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김홍일 의원이 이권과 관련된 로비에서 1억5천만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으므로, 2002년에 국민에게 사과하기도 했다. 또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던 최규선이 각종 이권에 개입한 혐의로 구속된 ‘최규선 게이트’가 발생했다. 3명의 아들이 모두 권력비리에 연루되어 이권개입으로 구속된 전력이 있다.
2002년 2월 24일에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직에서 퇴임하였다.
퇴임 이후[]
2004년 1월 29일 재심을 청구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판결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의의[]
김대중의 당선은 여러 가지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으나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뽑을수 있다.
첫째로는 권위주의, 국가주도계획경제, 냉전이라는 과거 정권의 유산을 청산하고 민주주의, 시장경제, 냉전의 해체로의 전환한 것이다. 최초의 민주개혁을 시도한 것은 문민정부였지만 김영삼 대통령 개인의 명령에 따라 시작되어 그 이후에도 대통령 개인의 판단력에 의지했기 때문에 개혁의 계획성이 부족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보였다. 시간이 지나가도 가시적인 과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기득권 세력의 강한 반발에 부딛혔다.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으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군부 권위주의 정권의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등 몇 가지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문민정부는 군부 독재권 위주의 청산에는 실패한 한계를 보였다. 오히려 문민정부는 대통령 개인의 판단력과 명령에 개혁 전반을 의존함으로서 오히려 권위주의를 연장시켰다. 그 때문에 문민정부는 문민 권위주의 정권, 민주주의의 탈을 쓴 독재정권의 연장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탄생한 국민의 정부는 탈권위주의와 용서와 화합을 목표로 새로운 민주개혁을 추진했다. 여러 가지 비판이 있었지만 과거 군부 독재시대의 관련자들을 사면시킴으로서 용서와 화합이라는 원칙을 실현시켰다. 권력의 분할을 통해 권위주의 청산에 나섰으며 이는 노무현 정부에 계승되었다.
김대중 정권은 IMF 관리가 시작되었을 때 탄생되었다. 초창기 김대중 정권의 가장 주요한 문제는 IMF체제에서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민주적 시장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한다는 협약을 맺고 노사정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국민들의 열렬한 참여, 성공적인 외환관리와 개혁 성공으로 IMF 관리체제를 조기에 극복하게되었다
둘째로는 50여 년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민주적, 평화적인 정권교체이다. IMF라는 위기상황에서 국민들은 야당을 선택함으로써 주권자 국민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인시켰다.
평가[]
김대중이 대통령에 오르면 독재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가 있을것이라는 예측이 있었으나 용서와 화합을 내세워 과거 독재정권의 관계자들을 대대적으로 사면시켰다. 김대중 자신이 민주화 운동으로 독재정권에게 여러 차례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것은 놀라운 정치적 관용이다. 이제 어느 누구도 독재정권을 세울 수 없다는 자신감과 민주주의가 복수를 위해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대의를 따른 것이기도 하다. 물론 독재정권으로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는 비판이 있다.
과감한 경제개혁으로 조기에 경제위기를 극복했고, 흡수통일을 파기하고 대북포용정책을 견지하여 새로운 남북관계의 지평을 열었다. 2000년 아시아 민주주의에 대한 공로와 남북 화해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대외적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정치 개혁에도 여전히 정치 수준이 후진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지역분열을 개선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김대중 정권의 짐이 되었고 대부분 크게 해결되지 못한 채 차기 정부의 극복 과제로 남게 되었다.
김대중은 대중적 카리스마와 탁월한 달변으로 강력히 민주화 운동을 주도해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여전히 김대중은 진보세력에게는 위대한 민주주의 대통령으로 보수세력에는 이른바 민주세력 무능론의 대표격인 인물로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비판[]
그의 정치세력 기반이었던 전라도 지역에서 강한 지지를 받고 있으나, 이와 반대로 경상도 지역에서는 강한 반감을 받고 있다. 이런 지역적 지지도 편차는 동서간 지역감정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경력을 의심스러워하는 주요 보수 언론들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특히 1987년의 야당 후보 단일화 실패로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적 기대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각기 출마해서 결과적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에 대해 비판이 있었다. 그리고 1992년의 정계 은퇴 약속을 어기고 1995년에 정계에 복귀한 것에 대해 비판도 있었다.
햇볕정책은 야당인 한나라당과 주요 보수 언론에 의해 실패로 지적되기도 한다. 북한의 독재정권을 유지시키고 핵무기 개발을 도왔다는 것이다. 일부 의견 중에는 대북자금이 그의 노벨상 수상을 도왔다는 비난도 있으나 그의 퇴임 후에는 야당조차도 그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그의 햇빛정책에 대한 비판은 자제하고 있다. 김대중은 2006년 9월 12일의 대담에서 햇볕정책을 통해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북한의 핵실험에도 큰 동요가 없을 수 있었다고 의견을 표명했다. 햇볕정책의 평가에 대해서는 평가자가 처한 입장과 생각에 따라 해석이 크게 갈라지는 상황이며, 햇볕정책 비판론 자체가 의미없는 모략이라는 주장도 있다. 햇볕정책을 실패작이라고 비난하는 한나라당 스스로도 2007년 7월 현재 햇볕정책을 승계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1]
김대중 정부가 외환 위기에 대처한 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다. 외환위기의 극복은 한국 경제의 체력을 생각했을 때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는 일이라는 평가도 있으며, 하버드대의 마틴 펠스틴은 ‘한국의 외환위기는 금융위기의 성격을 띄고 있을 뿐,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에서 온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또한 대기업을 억제하는 정책으로 인해, 높은 성장률을 만들 동력을 약화시켰다는 지적이 있다.
국제통화기금의 정책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 김대중과 비교할 때,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미국 등의 구미 자본에 부정적인 입장을 띠고 있어, 김대중과는 외환위기 대응 정책과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한국과 말레이시아의 경제구조나 규모가 크게 다르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벤처에 대한 육성과 카드에 대한 장려는 당시 경제를 진작시키기 위한 방안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진행을 효과적으로 조정하지 못하여 후일 카드 때문에 개인경제가 큰 타격을 입는 사태가 벌어졌다. 카드대란은 카드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개인 당사자에게 1차적 책임을 물어야 할 문제이기는 하나, 발급능력이 없는 개인에게까지 무분별하게 카드를 발급하던 당시의 상황을 조절하지 못한 것은 실책으로 평가된다.
수상 경력[]
- 1981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 1987년 미국 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 인권상(조지 미니상)
- 1987년 북미주 한국인권연합 인권상
- 1993년 한국애서가클럽 애서가상
- 1994년 미국 유니온신학대학교 유니온메달
- 1998년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 1999년 필라델피아 자유메달
- 2000년 라프토 인권상
- 2000년 노벨 평화상
- 2001년 세계정치지도자상
- 2002년 국제행동을 위한 의원연합의 민주주의 수호자상
- 2003년 늦봄통일상
- 2003년 ‘춘사 나운규 영화제’ 공로상
저서[]
- 《분노의 메아리》 (1967년)
- 《내가 걷는 70년대》 (1970년)
- 《독재와 나의 투쟁》 (1973년)
- 《김대중 옥중 서신》 (1984년)
- 《행동하는 양심으로》 (1985년)
- 《대중경제론》 (1986년)
- 《민족의 새벽을 바라보며》 (1987년)
- 《공화국 연합제》 (1991년)
- 《한국 :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 (1992년)
- 《세계 경제 8강으로 가는 길》 (1992년)
-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3년)
- 《나의 길 나의 사상》 (1994년)
- 《김대중의 21세기 시민 경제 이야기》 (1997년)
- 《나의 삶 나의 길》 (1997년)
- 《대중참여경제론》 (1997년)
- 《내가 사랑한 여성》 (1997년)
-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 (1997년)
-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8년)
- 《김대중 자서전 -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1998년)
- 《경천애인》 (2002년)
- 《21세기와 한민족》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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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기[]
- 노벨 평화상
외부 링크[]
주석[]
- ↑ 〈한국 노동운동의 진로〉, 《사상계》, 195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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