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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사건(金大中拉致事件) 은 일본으로 망명 중이던 김대중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도쿄호텔 그랜드팰리스 2210호실 부근에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8월 13일에 서울의 자택 앞에서 발견된 사건이다.

사건의 배경[]

김대중은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현직 대통령에게 97만 표 차이로 석패했다. 박 대통령은 신승을 거두었지만,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김대중에게서 위기감을 느꼈다. 대통령 선거 얼마 뒤, 김대중은 교통사고를 가장한 암살 시도로 인해 골반 관절 부위에 부상을 당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김대중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후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일본과 미국을 중심으로 박정희 반대 투쟁과 민주화 운동을 진행했다.

박정희는 1972년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이 무렵 박 대통령의 측근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평양을 방문하여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가졌고, 그 답례로 박성철 제2부수상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방문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가졌다. 그 결과 7월 4일에 조국통일 촉진을 위한 원칙에 대한 합의가 담긴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이 역사적인 회담 결과 한국에서는 이후락에 대한 평가가 급상승했고, 박 대통령의 후계자라는 설까지 나돌게 되었다.

그런데 수도경비단장인 윤필용 장군이 이후락과의 대화중 “대통령이 나이가 드셨으니 후계자를 골라야 한다”라고 발언한 것이 알려졌고, 격분한 박정희는 두 사람 및 관계자를 체포하여 수사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측근이 반역자로 지목되는 상황은 박정희 정권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이후락은 석방되었다.

이런 사건으로 인해 박 대통령의 눈 밖에 난 이후락은 자신의 명예를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하여 박 대통령의 정적인 김대중을 납치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사건 경위[]

김대중은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의 반박정희 집회 참가를 앞두고 호텔 그랜드팰리스 2212호에 투숙하고 있었다. 1973년 8월 8일,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던 양일동 한국민주통일당 대표의 초청을 받아 가진 회담을 끝내고 나오던 도중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했고, 비어 있었던 2210호실에 감금되었다. 김대중은 이 방에서 마취약을 투여받아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오사카로 옮겨져 납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대중은 나중에 “배를 탈 때 다리에 무게추를 달았다”라고 증언했다. 바다에 수장될 위험이 있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동해 일본측 해안에서 해상자위대 함정이 추격해왔고, 사건이 발각될 것을 우려한 요원들은 계획을 변경하여 김대중을 부산까지 데려가서 풀어주었다.

김대중은 납치 사건 닷새 뒤, 서울의 자택 앞에서 발견되었다.

사건 이후[]

사건을 조사한 일본 경찰은 주일 한국 대사관의 직원이 납치 집단에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의 양해 없이 김대중을 납치해 한국으로 이송한 것은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1973년 8월 23일에 열린 참의원 법무위원회에서는 한국 정부기관의 관여 혐의, 주권 침해 여부, 김대중의 재도일(再渡日), 일본의 수사 상황 등을 정부 측에 물었다. 이에 대해 다나카 이사지 법무성 장관은 “나의 제6감으로 볼 때 이 나라 비밀 경찰의 소행이 틀림없다.”라고 발언했다. 하지만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성 장관은 사건에 대해 ‘단정할 수는 없’으며, ‘(한국 정부의) 해명 이후 일본의 태도를 결정’하겠다고 답변했다.

이어 한국 정부는 1973년 8월 25일 한국 대사관의 이상진 정무담당참사관을 통해 ‘일본 국회 등의 논의나 신문의 보도 등에서 한국 정부의 직원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는 듯한 내용을 전개하는 것은 유감’이라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자 다나카 법무성 장관은 이러한 태도를 가리켜 “매우 괘씸한 변명이다.”라고 지적하며, ‘한국 정부의 그러한 태도는 우리 국회에 대한 중대한 간섭’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1973년 9월 5일 경시청은 주일 한국 대사관의 김동운 일등서기관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 야당 측에서는 ‘한국 정부의 주권 침해에 대해 강력히 대응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 측은 ‘지금은 진상 규명이 첫째로, 현 단계에서는 주권 침해라고 볼 수 없으며, 지금과 같은 한국과의 관계를 변경할 생각은 없다.’라고 답변했다.

1973년 9월 17일 한국 정부는 ‘김대중 납치 사건 수사 자료’를 발표하고, ‘용금호에 대해 면밀히 조사했으나, 현재까지 김대중 납치 용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일본 정부에 회답했다. 이어 9월 21일에는 일본 국회에서 내각 불신임안이 제출되었으나 부결되었다. 이 불신임안의 제출 이유에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 포함되었다.

1973년 11월 1일 한국 정부는 납치 사건에 대한 주일 한국 대사관 직원의 관여 혐의를 인정하고 사의를 표명하려는 의향을 표명했으며, 김동운 일등서기관을 면직시켰다(다만 이것은 김동운 일등서기관이 범인이라는 이유는 아니었다). 같은 날 박정희 대통령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에게 납치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다음날에는 김종필 대한민국 총리가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1974년 8월 6일 일본 수사당국은 수사 보고서를 발표해, 김대중 납치 사건의 범인 중 한 사람으로 김동운 일등서기관을 지목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74년 8월 14일에 그의 혐의에 대해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일본 당국에 통보했다. 다음날에는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일본에서 출생·성장한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을 저격했다. 이로 인해 영부인 육영수가 피격되어 사망했으며, 시나 에쓰사부로 자유민주당 부총재가 9월 19일 일본 정부의 특사로 저격 사건의 진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1974년 10월 25일에 일본 당국은 한국 정부의 수사 결과는 납득할 수 없다며 상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이 요청에 따라 1975년 7월 22일에 수사결과에 대해 다시 회답하면서, 사건 후 김동운 일등서기관의 직위 해제 이후 수사를 진행했지만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없어 1974년 8월 14일 수사를 중단했으며, 이후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했으나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어 불기소 처분을 했으며, 이후 도쿄에서 그의 언동이 품위에 어긋난다고 보여 공무원의 지위를 박탈했다는 요지를 통보했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회답에 1975년 7월 23일미야자와 기이치 외무성 장관이 한국을 방문해 양국의 정기회담 개최에 합의하고 다음날 귀국했다. 귀국 즉시 미야자와 외무성 장관은 김대중 납치 사건의 결말이 지어졌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의회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은 한국 중앙정보부의 범행’이라고 발언하면서 사건이 다시 불거졌다. 이어 1977년 7월 1일에 일본 교토통신과의 회견에서 증언을 두고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발언한 후쿠다 다케오 일본 총리를 비난하면서, “한일 두 정부가 반성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의 명예와 신뢰성에 상처를 입혀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에 대한 양국 국민의 눈을 가리려 한다면, 더욱 상세한 사실을 밝혀 양국 정부의 죄상을 고발하겠다.”라고 밝혔다.

2006년 2월,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1947년부터 1974년 사이의 비공개 외교문서를 공개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납치 사건과 관련된 많은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참고 자료[]

  • 《전후일본외교사》, 이리에 미치마사,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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