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金鍾泌, 1926년 1월 7일 부여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김해.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삼김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정치를 이끌었다. 1961년 5월부터 1963년 1월까지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었고, 1971년 ~ 1975년, 1998년 ~ 2000년에 걸쳐 두 차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충남 부여 출신으로 이후 국회의원으로서도 부여지역을 낀 선거구나 전국구 비례대표를 통해 당선되었다.
김종필은 1949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61년 박정희가 이끄는 군사 쿠데타(5·16 군사정변)를 주도하였고 이후 박정희의 18년간의 통치 기간 중 민주공화당 의장을 포함한 요직을 두루 맡았다. 또한 1963년 6대 국회 때부터 의정활동을 하여 총 9번 임기를 채웠다. 이것은 김영삼, 박준규 와 함께 가장 여러번 국회의원이 된 기록이다.
1995년에 자민련 총재직을 맡았으나 2004년 국회의원선거에서 교섭단체구성요건이 되는 의석도 채우지 못하며,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자신도 낙선하자, 2004년 4월 19일 총재직을 사퇴하면서 정계 은퇴 선언을 하였다.
그는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의 브레인으로 활동하면서, 쿠데타 관련 인물중 몇 안되는 예비역 영관급으로서의 약점을 딛고 핵심 공약등을 잡고 일어나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자신이 초대 국장으로 취임하였으며, 박정희의 공과중 하나로 기록되는 한일협정 의 실질적인 교섭가로 활동했다.
1968년, 반대 세력에 밀려 공직에서 물러났으나, 6대부터 참가한 국회의원으로서의 이력을 유지해 이후로도 꾸준히 정치계에 이력을 유지했지만 80년 신군부에 의해 정치 활동이 금지되며 재산환수를 당한다.
이후 87년 신민주공화당을 수립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며 정계에 다시 두각을 드러내며, 88년 13대 국회의원으로 복귀한다. 90년 당시 노태우, 김영삼과 삼당합당을 통하였으나, 다시 정계에서 일정 거리를 물러나, 95년 2월 자유민주연합이라는 독자정당으로 독립한다. 당시 이회창에게 열세에 있던 김대중의 민주당과 손을 잡아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취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대통령으로서의 꿈을 가진 야심가였지만, 긴 정치 역사상 실제로 당선은 되지 못하여 영원한 2인자라는 별명을 얻게된다. 일본어 회화 능력이 있고, 미국 육군 보병 학교등의 유학 경력으로 외국에 대한 견문도 있다.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일 | 사망일 | 활동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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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김상배(金相培) | 별세 | ||
어머니 | 이정훈(李貞薰) | 별세 | ||
형 | 김종익(金鍾翊) | 1918년 6월 27일 | 별세 | 전 공화당 국회의원 |
아내 | 박영옥(朴榮玉) | 1929년 9월 28일 | 생존 | 박상희의 딸 |
딸 | 김예리(金禮利) | 1951년 9월 7일 | 생존 | (주)팜스 회장. |
아들 | 김진(金進) | 1961년 9월 3일 | 미국 국적 과테말라 출신 리디아와 결혼, 파나마에서 무역업 운영. |
김종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이기도 하다.
전 임 백두진 |
제11대 국무총리 1971년 6월 4일 ~ 1975년 12월 18일 |
후 임 최규하 |
전 임 고건 |
제31대 국무총리 (서리: 1998년 3월 3일 ~ 1998년 8월 17일) 1998년 8월 18일 ~ 2000년 1월 12일 |
후 임 박태준 |
틀:제16대 비례대표 자유민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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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Kim Jong P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