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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金炯旭, 1925년 1월 16일 - 1979년 10월 7일)은 대한민국중앙정보부 부장이었다.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 1961년 5·16 군사정변 때 중령으로 참여했다.

그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의 한 사람이었다가, 1963년 7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중앙정보부장으로 김형욱을 임명했다. 여기서 김형욱은 박정희의 제5대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가 밀리면 부정적인 방법을 동원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고 여러 추악한 작전을 세워놓았으며, 결국 그 작전을 씀으로서 박정희를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김형욱은 박정희의 대역으로서 나쁜 일, 좋은 일 가리지 않고 박정희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처리했고, 이 때문에 국민들에게 원성을 사게 되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 1969년 3선 개헌 때에도 활발히 활동하다가, 국회의원 이만섭이 해임건의안을 박정희에게 전달하고, 결국 1969년 10월 20일 박정희는 김형욱을 해임시킨다.

이후, 김형욱은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72년 10월 17일유신이 선포되어 국회가 해산되자, 그는 의원직을 상실당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이때까지 박통의 정권 밑에서 허수아비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박정희에 대한 깊은 원망을 품었다. 1973년 4월 15일 김형욱은 자신의 중앙정보부장 시절 비서실장이었던 문학림과 같이 대만으로 출국했고, 이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살았다.

1977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김형욱은 미국 연방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박정희 정권의 비밀스러운 사건들을 거침없이 폭로하였고, 이어 일본으로 가서 회고록을 내자, 박정희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김형욱을 암살할 것을 명했다.

1979년, 김형욱은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을 만나 프랑스 파리로 가라는 말을 들었고, 1979년 10월 1일 김형욱은 파리에 도착했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알 길이 없다.

1984년 김형욱이 돌아오지 않자, 그의 가족들은 그를 사망 신고 했다.

2005년 자신이 김형욱을 죽였다고 주장하는 이 모씨가 〈시사저널〉에서 김형욱을 마취시킨 뒤 반쯤 의식불명이 된 김형욱을 산채로 머리부터 양계장 대형 믹서에 넣어 갈아 죽였으며 가루는 닭모이로 주었다고 밝혔다.

김형욱이 암살당하고 2주 뒤, 박정희 역시 사망했다. 권력이란 참으로 허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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