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페인위키아
Advertisement

박마리아(朴瑪利亞, 1906년 ~ 1960년 4월 28일)는 제1공화국의 제2인자로 불렸던 이기붕의 부인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여성계의 지도층 인사였으며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을 지낸 대한민국의 교육인이기도 하다.

생애[]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어릴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서 어렵게 자랐다. 박마리아의 어머니 고의대는 감리교 목사 정춘수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면서 개신교에 입문, 전도사가 된 인물이다.

박마리아는 정춘수의 주선으로 개성감리교 계열 여학교인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는 생활이 매우 어려울 때라 민며느리로 들어가라는 주위의 권유가 있었으나 학업에 대한 욕심으로 힘들게 호수돈여고보에 입학했고, 재학 중에도 윤치호의 딸로 개성에 살고 있던 윤봉희의 도움으로 겨우 학교를 마쳤다.

고교를 졸업한 뒤에는 호수돈여고보 동창의 도움을 받아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 1928년 영문과를 졸업하고 모교의 교사를 지냈다. 그는 선교사의 주선으로 이번에는 미국에 유학하여 학사 학위와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이화여전에서 강의를 하다가, 1935년 미국 유학 중 만난 열살 연상의 이기붕과 결혼한 뒤로는 조선 YWCA 연합회에서 근무했다.

조선 YWCA 연합회는 1938년 내선일체의 원칙 하에 일본 YWCA 연맹 산하로 흡수되는데, 이때 박마리아는 김활란, 유각경과 함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의 와중에서 지식인들을 동원한 친일 강연에 적극 참가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을 지원했다.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1942)에 가담했으며, 각종 간담회에 등장하여 징병제에 호응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때의 활동으로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에 포함되었다.

이승만과 가깝던 남편 이기붕은 광복후 이승만의 집권과 함께 정치를 시작했다. 특히 이승만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도너가 영어가 유창한 박마리아를 가까이 두기 시작하면서, 박마리아와 이기붕 부부는 이승만 정권의 실세로 떠오르게 되었다. 박마리아는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로 임용되고 대한부인회의 부회장에 피선되었으며, 이기붕은 대통령 비서실장(1948)과 서울특별시장(1949)이라는 요직에 임명되었다.

이기붕이 제1공화국의 2인자로 부상하는 시점에 박마리아도 이화여대 문리대 학장, 부총장과 YWCA 회장이 되었다. 문리대 학장과 YWCA 회장에는 한국 전쟁 중이던 1952년에, 이화여대 부총장에는 이기붕이 제3대 정ㆍ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1956년 취임했다. 이 무렵 그의 집은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릴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고 있었다.

1957년 박마리아는 장남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고,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1960년 제5대 정ㆍ부통령 선거는 전면적인 관권 부정 선거로 치루어졌는데, 이때 박마리아가 회장을 맡고 있던 대한부인회를 비롯한 여성 단체들이 동원되었다. 대한부인회는 전국 대회를 통해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선거 결과 이기붕은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4·19 혁명을 불러와 자유당 정권이 붕괴하고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하고 말았다.

1960년 4월 28일 박마리아 일가는 결국 경무대 별관에서 가족 동반 자살을 감행했다.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이강석이 권총을 이용해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을 차례로 쏘고 자결한 것이다. 책임을 모두 이들에게 덮어씌우고 사태를 가라앉히기 위해 누군가 타살한 것이라는 소문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박마리아가 살던 집은 국가에 환수되어 집터에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참고자료[]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