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POV 틀:공무원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음력 9월 30일)[1]~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 6, 7, 8, 9대 대통령(1961년~1979년)이다.
생애[]
탄생/소년·청소년기[]
박정희는 1917년 음력 9월 30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의 금오산 자락에서 아버지 박성빈(46세)와 어머니 백남의(45세)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박정희의 위로는 장남 동희(22세), 차남 무희(19세), 장녀 귀희(15세), 삼남 상희(11세), 사남 한생(7세), 차녀 재희(5세)가 있었다. 아버지 박성빈은 영락한 양반 계급으로 처가 문중의 산지기로 호구지책을 삼으며 술로 소일했다.[2] 박정희는 어머니가 원치 않는 자식이었다. 45세에 임신한 데다,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남의는 박정희를 낙태하기 위하여 온갖 민간요법을 총동원하였으나, 박정희는 결국 태어났다. 태아 시절에 겪은 시련 탓인지 아버지와 형들이 기골이 장대한데 비해, 박정희는 왜소하고 까만 얼굴을 갖게 되었다. 박정희는 가끔 큰 누나의 젖을 먹기도 했다.[3] 구미공립보통학교 시절, 1등을 하면 급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공부를 잘하던 박정희는 3학년 때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이 때 박정희의 급우들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었다고 같은 반 동기생이었던 박승룡이 회고한 바 있다.[4] 박정희의 어린 시절과 사범학교 시절에 많은 영향을 준 인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꼽을 수 있다. 박정희는 이 시기에 줄곧 나폴레옹의 전기를 되풀이하여 읽었다.[5]
청년기[]
1936년 4월 1일 세 살 아래인 16세 처녀 김호남과 결혼했다. 앓고 있던 아버지가 죽기 전에(아버지 박성빈은 1938년 9월 4일 67세로 사망하였다.)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해서 강제로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1937년 3월 20일,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4월초, 만 20세의 나이에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박정희는 여기서 1940년까지 재직하였다.[6] 보통학교 교사 직을 하던 중 중국 지린성 창춘 군관 학교에 자원하여 일본군과 입학하였다. 그 뒤 수석으로 창춘 군관 학교를 졸업했으며, 그 시기에 다카키 마사오(일본어: 高木正雄)로 창씨 개명했다. 이후 박정희는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라는 일본식 창씨 개명을 또 하였다.
광복 후[]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하고 광복이 되자 그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1946년 졸업, 광복을 맞은 한국의 군대에서 다시 소위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좌익쪽의 장교였던 그는 1948년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에 연루 혐의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남로당 출신 장교에 대한 정보를 폭로한 대가로 예편하는 대신 실형은 면하였고, 한국 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다.
군사 정변과 제3공화국[]
박정희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쿠데타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4.19 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김종필을 비롯한 추종 세력을 규합하였고, 이듬해 1961년 5월 16일, ‘군사 혁명 위원회’의 이름으로 반공 친미, 부패 척결, 경제 재건 등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을 붕괴시켰다. 5월 18일‘군사 혁명 위원회를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개칭하고 치안 확립과 경제 개선을 목표로 하였으며 6월 10일에는 비밀 첩보 기관인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켰다. 7월 3일에는 장도영을 실각시키고 스스로 국가 재건 최고 회의 의장에 올랐다. 이듬해인 1962년 제2공화국 정부가 기획 중이었던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고 울산 공업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며 경제 발전을 모색한다. 또한 그 해 1962년 3월에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 권한 대행을 물려 받았다. 군에 복귀한다는 이른바 혁명 공약과는 달리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관권 및 금권을 동원한 부정 선거에도 불구하고, 15만표 차이로 윤보선에 신승하면서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5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한일협정 채결 등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질 자금을 마련했다. 1967년 재선에 성공하여 제6대 대통령이 된다. 1969년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꺾고 3선에 성공한다. 이보다 앞선 1970년에는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여 농촌 개발에 앞장선다.
10월 유신과 제4공화국[]
1972년 친위 쿠데타인 10월 유신을 단행해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긴급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1/3에 대한 실질적 임명권 등 총통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한을 간선제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 통과시킨다. 긴급조치 1호에서 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정치 활동, 언론 및 표현의 자유에 심대한 제한을 가하였다. 또한, 1975년 인혁당 재건 사건 관련자(2007년 재심에서 무죄 확정)를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하여 8명을 대법원 확정 판결 이튿날 사형 집행하는 등 정권 반대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1978년 정권의 '거수기' 노릇을 하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으로 5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5개월 후 치뤄진 제10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집권 민주공화당이 야당인 신민당에 득표율에서 뒤지는 (다른 야당인 민주통일당까지 더하면 득표 격차는 8%에 이른다) 등 민심 이반의 조짐이 나타났다. 1979년에는 YH 여공 신민당사 점거 농성 사건, '공작 정치'에 의한 신민당 당수 김영삼 제명, 그에 따른 부마 항쟁,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갈등 등으로 정권의 기반은 더욱 크게 흔들렸다. 부마 항쟁을 군대를 동원해 진압한 직후인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 후 귀경하여, 궁정동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불러 연회를 하던 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암살당하였다. 당시 나이 만 62세였다.
약력[]
- 1926년 - 구미보통학교 입학
- 1932년 - 구미보통학교 졸업, 대구사범학교 입학
- 1937년 - 대구사범학교 졸업, 문경보통학교 교사 부임
- 1940년 -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입학
- 1942년 - 만주 군관학교를 420명 중 1등으로 졸업, 일본육군사관학교 57기로 특전 입학
- 1944년 -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만주군 보병 제8단에 소위로 임관
- 1946년 -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현 육군 사관학교의 전신) 2기 생으로 입학. 12월 졸업, 대위 임관
- 1948년 -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남로당 가입 등 좌익 활동 혐의로 체포
- 1950년 - 한국전쟁의 와중에 소령으로 복직
- 1955년 - 제5사단장 역임
- 1957년 - 제7사단장 역임
- 1959년 - 제6관구 사령관 역임
- 1960년 - 1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12월 제2군 부사령관 역임
- 1961년 -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장면 정권을 무너뜨림
- 1963년 - 윤보선을 15만표 차로 누르고, 대통령 당선.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취임
- 1965년 -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는 한일협정 타결
- 1967년 - 윤보선을 다시 누르고,재선
- 1969년 - 3선 개헌을 통과시킨 후 1971년 김대중을 가까스로 이기고 3선에 성공.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 파병.
- 1972년 - 국회 해산 및 계엄령 선포. 그해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10월 유신).
- 1974년 8월 15일 -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동포 문세광의 저격시도로 영부인 육영수 사망(육영수 저격사건)
- 1979년 10월 26일 -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10·26 사건). 서거.
평가[]
박정희는 재임 기간 중 경부고속국도 건설, 수출 증대, 식량 자급 자족 실현, 새마을 운동 등을 통한 인프라 구축으로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평이 많다. 그러나,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군사 정변으로 전복한 집권 과정,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탄압, 극심한 인권 탄압 등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이 많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현대, 금성, 삼성 등의 재벌 기업이 성장하고 포항제철로 대변되는 중화학 공업이 중추 산업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1997년 일어난 외환 위기 이후, 박정희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일었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은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성장의 불균형을 야기시켰고, 이렇게 성장한 대기업과의 정경유착으로 인한 한국 재벌의 총체적 부실이 결국 한국 경제의 부실로 이어져 외환위기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2000년대에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다. 친일파, 반역자, 기회주의자 및 독재자, 지역주의의 씨앗을 뿌린 장본인이란 부정적인 평가와,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한 대통령이란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진보-보수를 나누는 하나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같은 정치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일부 여론 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 역대 대통령들 중 경제적으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대통령으로 뽑혀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일부 언론에선 박정희의 구체적 친일 행적을 취재, 보도하여 다시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65년 일본과 채결한 한일협정의 내용 중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불리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이 적절했는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일각에선 이 협정에 대해 '굴욕 외교'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한일협정을 통해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은 후일 한국 경제를 도약시키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으나, 지금까지도 종군 위안부(정신대) 및 일제에 의해 징병 혹은 징용 당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적절치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현재, 일본측에서는 한일협정을 통해 모든 보상을 마쳤다는 공식 입장을 표명중이다. 이에 대해 종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현재까지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계속 하고 있다.
1969년 베트남 파병은 한국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시키는데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달리, 베트남 파병이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가족 관계[]
- 부친 박성빈, 모친 백남의
- 형제 자매
- 장남 동희(東熙) - 1남 1녀 (재홍, 재선)
- 차남 무희(武熙) - 2남 1녀 (재석, 재호, ?)
- 장녀 귀희(貴熙) - 3남 2녀 (은희만, ...?)
- 삼남 상희(相熙) - 1남 4녀 (준홍, 영옥, 계옥, 금자, 설자)
- 사남 한생 - 어려서 죽음.
- 차녀 재희(在熙) -
- 부인 김호남 (이혼)
- 딸 재옥 - 한병기 전 국회의원과 결혼
- 부인 육영수
박정희는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 김종필의 처숙부이기도 하다.
바깥 고리[]
주석[]
- ↑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 초인의 노래》(조선일보사, 1998) 318~320쪽 참조.
- ↑ 박정희는 1917년~: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 초인의 노래》(조선일보사, 1998) 318~320쪽 참조.
- ↑ 박정희는 어머니가~: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 초인의 노래》(조선일보사, 1998) 353~354쪽 참조.
- ↑ 구미공립보통학교 시절~: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 초인의 노래》(조선일보사, 1998) 353~354쪽 참조.
- ↑ 박정희의 어린~: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 초인의 노래》(조선일보사, 1998) 372~375쪽 참조.
- ↑ 1936년 4월 1일~: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121쪽 참조.
틀:대한민국의 대통령
전 임 송요찬 |
내각수반 1962년 6월 18일 ~ 1962년 7월 9일 |
후 임 김현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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