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白善燁, 1920년 11월 23일(음력 10월 11일) ~ )은 한국의 군인, 정치가, 기업인이다.
출생과 성장[]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19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 후, 교직에 종사했다. 그러나 군인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만주국 군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졸업 후는 간도 특설대에 배속되어 일본군에 저항하는 조선인 항일유격대 소탕 작전에 종사하다가 1945년 8월 15일 만주군 중위로서 종전을 맞이했다.
한국전쟁 이전[]
종전 후, 조선으로 돌아와 조만식의 민족주의 운동에 참가하지만, 김일성의 공산주의 지배를 싫어해, 1945년 12월 24일에 월남했다. 월남 후 1945년 12월 5일에 만들어진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1946년 2월 26일에 임관하여, 같은 해 1월 15일에 창설된 국방경비대에서 입대하여 제5연대장을 맡았다.[1]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정부군으로 재편되면서 제5연대장과 육본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로 하는 국군 1 보병사단 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하여 1951년까지 사단을 지휘하였다.
육본 정보국장 재직 중이던 1948년에 발생한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이후 공산 게릴라 소탕 및 숙군 사업을 지휘하였다. 이때 박정희의 구명에 힘쓰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 6월 25일에 다른 고급장교들처럼 서울에 있었던 백선엽은 급거 귀대하여 사단을 지휘하였으나, T-34/85 전차를 앞세운 북조선군에 밀려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후퇴하면서도 사단 편제는 그대로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으니, 개전 초기 한국군 전방 사단 중에서 편제를 유지하며 후퇴한 사단은 백선엽 대령의 1사단과 김종오 대령의 6사단(춘천 주둔)이 유일하였다. 대구로 후퇴하던 중 이 공로로 백선엽은 대령에서 준장으로 승진한다.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1군단에 배속되어 지원나온 미군 부대들과 함께 다부동 전투를 치렀으며, 미 1기병사단, 미 24보병사단과 평양 점령을 경쟁하여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하는 부대가 되기도 하였다.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출한 1사단은 중공군의 반격에 밀려 다른 유엔군과 함께 38선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미국이 북조선 및 중국과 휴전협상을 시작했을때 백선엽은 휴전회담의 한국군 대표로 참석하였고, 회담 도중 동부전선 상황이 악화되어 군단장으로 다시 강릉으로 부임하였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야전사령부"를 구성하였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한국군 최초로 현대화된 1군단을 창설하게 된다. 기존에도 1군단이 있었으나, 동부전선에서 졸전 끝에 괴멸하자 해체된 바 있다(이후 한동안 한국군 사단들은 군단급 이상 사령부 없이 미군 각 군단에 분산배치되기도 하였다). 1952년 4월에는 제2 군단장을 맡았으며, 1952년 7월, 육군 참모총장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32세였다.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군 근대화를 위한 미국 군사유학 강화(본인 자신도 포트 베닝으로 군사 유학을 다녀옴), 10개 사단 증설(11사단 ~ 20사단) 등을 추진하였다.
1954년에 1야전군 사령관을 잠시 지내다가, 1957년에 다시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59년에는 연합참모본부 의장으로 취임, 한국군의 근대화에 공헌했다. 그러나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 장교들에 의한 청군 운동으로 비난과 압력을 받아 1960년 5월 31일 퇴역했다.
퇴역 후[]
퇴역 후는 중화민국·프랑스·캐나다 대사를 거쳐 박정희 정권에서 교통부 장관으로 서울의 1기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읽을거리[]
- 친일인명사전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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