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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士林)은 15세기 이후 조선 중기 중앙정계를 주도한 정치집단이다. 훈구파에 대립하여 사림파(士林派)라고 불리기도 한다.

본래 고려 말부터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 사대부 가운데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은 조선 건국 시기에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주로 향촌사회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을 등용한 것을 계기로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네 차례의 사화를 거치며 훈구파의 탄압을 받다가 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훈구파를 정치의 전면에서 몰아내고 동인서인으로 나뉘어 조선 중기 붕당정치의 단초가 되었다. 뚜렷한 학통은 없으나 처음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제자들의 등용을 도운 김종직이 길재의 손제자였으므로 사림을 길재의 학통으로 보기도 한다.

사림의 배경[]

사림은 대부분이 조선의 건국에 협력하지 않고 지방에 내려간 학자들로, 중소지주층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훈구세력와는 달리 생업과 학문을 종사해야 했기 떄문에, 훈구 세력에 비해 경제적 기반이 취약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로 농사직설과 같은 농서가 간행되고, 목화와 약초등의 재배가 널리 퍼지면서, 농산물을 사고 파는 장시가 발달하여 전국적으로 형성되었다. 또한 저수지와 같은 농업 기반시설 확충으로 남부 일부 지역에만 보급 되었던 새로운 중국의 논농사 기술인 모내기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이모작이 널리 퍼지면서 농업생산성이 향상되었다. 이를 통해 농촌의 중소 지주인 사림도 경제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훈구 세력은 권력을 이용하여 광대한 농장과 많은 노비를 소유하는 등 재산을 크게 늘렸다.

향약의 보급[]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신진 사대부들은 향촌에 살면서 중소 지주로서 학문과 교육에 힘쓰고 있었다. 이들은 유향소를 구성하여 지방의 백성들을 교화하고 수려의 자문에 응하는 등 향촌의 행정을 도왔다. 사림은 향약을 보급하는 데에도 힘썼다. 이에 따라 중국의 여씨향약을 번역하여 전국에 보급하고, 점차 조선의 실정에 맞는 향약을 만들어 마을 단위로 시행하였다. 아울러 동네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어 시행해 오던 계의 운영방식을 향약 속에 흡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 안정에도 힘썼다.

서원[]

파일:Yerim center.jpg

예림서원에 있는 구영당

사림은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불교와 같은 다른 사상을 철저하게 배격하였다. 사림은 충과 효를 매우 중요시 하여 백성들에게 권장하고, 성리학의 윤리 교과서인 소학을 널리 보급했다. 또한, 사림은 서원을 세워 덕망이 높은 유학자를 기름과 동시에 지방의 양반 자제들을 교육했다. 가장 먼저 세워진 서원은 주세붕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영주에 세운 백운동 서원이다. 후에 이황의 건의에 따라 이 서원에 소수 서원 이라는 현판이 하사되었다. 서원은 국가로부터 토지, 노비, 서적 등을 지급 받았고, 면세를 받았다. 이후 서원은 성리학의 산실로서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늘어났다. 서원은 학문과 교육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당파끼리의 결속을 강화하여 붕당의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사림의 성장[]

조선은 건국 이후 100여년간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 힘을 쏟았으며, 이 것은 경국대전의 편찬으로 종료되었다. 그런데 15세기 말 부터 시림이 중앙의 정치에 등장하면서 부터 기존의 훈구 세력과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사림은 조선 건국에 협력하지 않고 지방에 머물러 학문과 교육에 힘썻던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학자들이었다. 성종은 합리적이고 온건한 유교정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영남 출신의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을 대거 등용하여 언론 기관에 배치하고 정책을 비판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여 훈구 세력의 문제점을 공격하면서 공론 정치를 유도하였다. 이에 따라 이 두 세력 간의 정치적 견제가 심해졌다. 사림을 옹호하던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훈구세력은 무오사화 등을 일으켜 사림을 공격하였다. 이로인해 사림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사림이 다시 등용되어 조광조를 중심으로 유교적 이상 정치를 펴고자 하였으나, 훈구세력의 반발로 다시 사화가 일어나 실패하고 말았다.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네번의 사화로 인해 사림은 큰 손실을 보았지만, 이들은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으며, 향촌의 서원과 향약을 바탕으로 꾸준히 성장해 나갔다.

붕당의 출현[]

선조가 인격이 훌륭하고 덕망이 높은 사림을 많이 등용하고 문치주의로 정치를 이끌어가자, 사림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 정권이 등장하면서 사림 내부의 분열로 붕당의 대립이 생겨났다.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와 공론을 둘러싸고 사림 정권이 신진 관료 및 김효원을 비롯한 동인과 기성관료 및 심의겸을 필두로 하는 서인으로 나뉘면서 붕당이 형성되었다. 이조 전랑은 삼사의 관리에 대한 인사를 주도할 수 있었고, 스스로 후임을 추천할 수 있었다. 또한 삼사의 관리들은 언론을 통해 이조 전랑을 지원하였다. 붕당은 이들 언론기관과 이조 전랑 자리를 둘러싸고 대립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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