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모(申性模,1891년 10월 20일 의령 -1960년 5월 29일[1])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소창(小滄). 신재록(申載祿)의 6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김해 김씨(金海金氏)이다.
생애[]
1910년 보성법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 경술국치를 당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신채호(申采浩)와 고향선배인 안희제(安熙濟)의 지도 아래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3년 상하이로 가서 오송상선학교(吳淞商船學校) 항해과를 수료, 한때 중국군 해군소위에 임명되어 중국해군본부에서 근무하였다. 1919년 김복희(金福喜)와 결혼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일하였다. 같은 해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조선에 대한 미국의 위임통치 청원을 서면 제출한 데 분개하여, 박용만(朴容萬)·신숙(申肅)과 함께 이승만 성토문을 발송하였다.
192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 연락처이던 백산상회에의 독립 자금 전달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었다. 1925년 석방되자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의 해양대학에서 수학, 1등 항해사자격을 얻었다. 1930년부터 런던과 인도를 왕래하는 정기화객선의 선장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한 인도 상선 회사의 고문으로 취임하여 봄베이에서 체류하다 1948년 11월에야 환국하였다. 귀국 직후 대한청년단 단장과 교통부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고, 1949년 제2대 내무부장관을 거쳐 제2대 국방부장관을 지냈다. 국방부 장관 재직 당시인 1949년 7월 17일 대한청년단 훈련장에서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하루 안에 평양이나 원산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그 발언이 문제가 되자 자신의 발언이 오해되었다고 해명했지만, 그 해 9월초에도 "때 오기만 기다릴 뿐이고 밀고 갈 준비는 이미 됐다"고 주장했다. [2]
1950년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전황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발언했다. [3] 1951년에 발생한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둘러싸고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김종원(金宗元)과 함께 사건을 합리화시키고 있다는 국회의 비난을 받았고, 그런 와중에 세칭 국민방위군사건이 발생하여 국회에서 해임되었다.
1956년 11월 28일 - 4·19 혁명 직후, 제8대 해양대학장을 역임하였다. [4] 4·19 혁명 직후 병을 얻어, 이해 5월에 죽었다.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선영에 묻혔다.
평가[]
국내에 전혀 기반이 없던 신성모가 대한청년단장,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에 국무총리 서리로까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눈물이었다. 신성모는 이승만의 지시를 들을 때면 눈물을 흘리고, 전방을 순시하면서 이승만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또 눈물을 흘려 낙루장관(落淚長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5] 눈물과 더불어 신성모의 강점은 영어였다. 이승만은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을 우대했다.[6]
부록[]
참고자료[]
주석[]
전 임 윤치영 |
제2대 내무부장관 1948년 12월 - 1949년 3월 |
후 임 김효석 |
전 임 이범석 |
제2대 국방부장관 1949년 3월 20일 - 1951년 5월 5일 |
후 임 이기붕 |
전 임 이범석 |
국무총리 서리 1950년 4월 21일 - 1950년 11월 22일 |
후 임 장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