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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영(吳夏英, 1880년 4월 5일 ~ 1960년 9월 2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오화영(吳華英)"이라고도 한다. 아호는 국사(菊史)이다.

황해도 평산 출생이다. 어릴때 한학을 공부하다가 동학에 입교한 적이 있으나, 기독교로 개종하여 1906년 세례를 받았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감리교의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적극적으로 참가했다가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목회 활동을 한 적이 있는 개성과 원산의 지역 만세 운동을 조직한 것이 확인되어 비교적 중형을 받은 것이다. 출옥한 뒤 신간회에 참가했고, 광주학생운동흥업구락부 사건에도 연루되어 총 세번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민족대표 출신의 원로 독립운동가였기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민족당 당수 등으로 추대되었다. 우익 정치인으로서 반탁 운동에 뛰어들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미군정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 의원을 지냈고, 1946년에는 건국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정치학관을 세웠다. 초대 이사장은 3·1 운동의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이었던 강기덕이었으며, 그는 1948년 이 학교가 개명한 정치대학의 초대 학장을 맡았다.

1950년 5월 서울 종로구에서 제2대 민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다음 달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납북되었다. 이후 납치된 유력 인사들이 북조선 정부 지지를 표명하며 1956년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안재홍, 조소앙, 엄항섭 등과 함께 최고위원으로 참가했다. 따라서 이들이 납북되었다는 남한의 주장과는 달리, 북조선에서는 입북 인사라고 부르고 있다.

강요 또는 회유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나 북조선에서 공식 활동을 했고 애국 인사로 인정 받아 유해가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기에[1] [2][3][4], 다른 민족대표들보다 뒤늦은 1989년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자료[]

주석[]

  1. 연합뉴스. “납북 제헌ㆍ2대 국회의원 현황”. 2007년 10월 3일에 확인함. 조선일보 사장 겸 주필을 역임한 안재홍씨는 지난 65년 3월 1일, 3.1운동 33인중 한 사람인 오하영씨는 60년 8월 각각 운명했다. 
  2. 한국방송, 아주 특별한 만남 - 남북 최초 역사자료 공동전시회 《일요스페셜》(2001.3.18)
  3. 《연합뉴스》 (2002.1.30) “오하영 선생 60년 9월2일 사망”
  4. 신준영, 누워서도 남쪽 하늘만 보십니다 《민족21》 (2002.7.1)

틀:민족대표 33인

전 임
(종로구 갑)이윤영
(종로구 을)장면
제2대 국회의원(종로구 을)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무소속
종로구 갑: 박순천
후 임
(종로구 갑)윤보선
(종로구 을)김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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