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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성(李甲成, 일본어: 岩本正一, 1889년 10월 23일 ~ 1981년 3월 25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며 정치가이다. 아호는 연당(硏堂).

생애[]

대구 출생으로 약학을 전공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에서 수학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날 때는 학교를 중퇴하고 병원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민족대표 33인기독교 대표로서 참가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원로격인 33인과 학생들과의 매개 역할을 맡아 학생 시위를 조직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으며,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가한 공을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서훈 받았다.

출옥 후 1920년대까지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신간회, 흥업구락부 등에 참가하여 기독교 계통의 청년 운동을 계속하다가 1933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가 이때부터 일제의 밀정으로 일했다는 증언들이 다수 있다[1]. 그는 민족대표 33인 중 최린, 정춘수와 함께 창씨개명을 한 세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93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서 훈장 서훈자 중 친일 혐의가 있는 자의 명단을 발표할 때, 과거 독립유공자 심사위원까지 맡았던 이갑성의 이름이 포함되었다[2]. 하지만 밀정 혐의의 특성상 세월이 흐른 뒤 근거를 찾기 힘들었고 관련자 대부분이 사망한 상태가 되어 버린데다, 더 이상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의혹만 남았을 뿐 명확한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갑성은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45년 반탁운동을 위해 결성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1947년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을 역임했고, 1950년에는 국민회 소속으로 대구에서 민의원(民議院) 의원에 당선되었다. 1953년 집권당이던 자유당의 최고위원과 정무부장이 되었고, 1963년 민정 이양 시기에는 김종필이 주도한 공화당 창당 작업에 발기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3·1 운동 당시 김창준, 박희도와 함께 30대 초반으로 가장 연소한 편이었으며, 93세까지 장수함으로써 33인 중 가장 늦게까지 생존했다.

국토통일원 장관을 지낸 정치외교학자 이용희가 이갑성의 아들이다.

참고자료[]

  • 반민족문제연구소. 〈이갑성 : 독립 유공자로 훈장받은 친일 밀정 (이광일)〉. 《청산하지 못한 역사 2》. 서울: 청년사. ISBN 9788972783138. 

주석[]

틀:민족대표 33인

전 임
(대구부 갑)최윤동
(대구부 을)서상일
(대구부 병)백남채
제2대 국회의원(대구시 병)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무소속
(대구시 갑)조경규
(대구시 을)박성하
후 임
(대구시 갑)서동진
(대구시 을)조병옥
(대구시 병)이우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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