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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李範奭,1900년 10월 20일 -1972년 5월 11일)은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이며 호는 철기이다. 서울 출생.

1915년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고, 1919년에 운남 육군강무학교를 졸업,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에 가담하여 중대장으로 청산리 대첩에 참전했다.

지청천과 함께 광복군에 가담하여, 참모장이 되었으며, 1946년 봄, 귀국시에 광복군 중장으로 귀국했다(그러나, 미 군정은 광복군들도 군인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게 하였다). 귀국 후 이범석은 국방경비대의 고문직을 5개월 간 맡았다가,[1] 청년들을 광복된 새 나라의 역군으로 조직화하고 훈련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일이라 판단,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1946년 10월 `국가지상, 민족지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우익 민족 청년 운동 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약칭 족청)을 창설한다.

1948년 7월, 국회의 이윤영에 대한 총리 인준 거부로 이범석이 총리에 지명되고 1948년 8월 2일 110대 82의 표결로 국회의 인준을 얻어,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하였다. 일본 육사를 졸업한 친일파 장교들이 한국군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범석이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 중에 참회하는 뜻으로 조국 군대에서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1948년 10월 21일, 여순 14연대 반란사건과 관련, 기자회견에서 사실상 김구를 겨낭하여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서 벌인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했으며 그래서 시중에는 여순 14연대 반란사건김구의 선동이 작용하였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2]
  • 1952년 이승만이 8·5정부통령 선거에서 개헌의 1등 공신인 부통령 후보이자 족청계의 지도자인 이범석을 떨어뜨리고 함태영을 당선시키는데 앞장서자, 분노한 이범석은 선거에 경찰이 깊이 개입한 사실을 규탄하면서 국무총리 장택상김태선을 고소하였다.[3]


저서로는 회고록 <우등불>, <방랑의 정열>, 논설집 <민족과 청년> 등이 있다.

주석[]

  1. 귀국 후~간 맡았다가: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옮김,《한국전쟁의 기원》(일월서각, 1986) 232, 235, 236쪽.
  2. 1948년 10월~소문까지 나돌았다.: 반충남,〈"여순반란사건 인민재판은 없었다"〉《월간 말》,1998년 11월, 106쪽.
  3. 1952년 이승만이~김태선을 고소하였다.:안희수, 〈서론:정당의 형성이론과 한국정당의 발전과정〉,안희수 편저,《한국정당정치론》(나남, 1995),59쪽.
전 임
초대
제1대 국무총리
1948년 7월 31일 - 1950년 4월 20일
후 임
 신성모 
전 임
초대
제1대 국방부장관
1948년 8월 15일 - 1949년 3월 20일
후 임
 신성모 
전 임
장석윤
제8대 내무부장관
1952년 5월 - 1952년 7월
후 임
 김태선 

틀:1999년-이 달의 독립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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