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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李丙燾, 1896년 8월 14일 ~ 1989년 8월 14일)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로, 본관은 우봉(牛峰), 호는 두계(斗溪)이다. 실증 사학의 대표적인 사학자로 활동하면서 철저한 문헌 비판에 입각하였다는 평을 받았지만, 식민사관의 중추가 된 조선사 편수회에서 촉탁으로 일했던 경력은 친일이라는 지적이 강하며, 해방 이후 권력과 결탁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같은 해 서울대학교 교내 단체가 발표한 ‘서울대학교 출신 친일인물 1차 12인 명단’[1],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2]에도 들어 있다.

생애[]

1915년에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문학부 문학급사회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약 7년간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지리와 역사, 영어를 가르쳤으며, 문학 동인지 폐허의 창간에도 동참하였다.

1925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로 일하였고, 1933년부터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를 지냈다. 1930년에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조선총독부 및 조선사편수회 간부로 구성된 어용 친일 단체인 청구학회에 참여하였다. 1934년 5월 7일에는 한국과 근린의 문화 연구를 목적으로 하여 문일평, 손진태, 신석호, 이은상, 이희승 등과 함께 진단학회를 창립하고, 10월에는 진단학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1941년부터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출강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에 진단학회를 재건하고, 임시교원양성소를 구성하여 국어와 국사 중등교원 양성을 도모하였다. 서울대학교가 개교할 때에는 문리과대학과 사학과 창설에 기여하였다. 1952년에는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이후 1962년까지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950년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에 임명되어 4년간 복무하였다.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9년에는 종신회원이 되었다. 1954년부터 1960년까지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냈으며, 1955년부터 1982년까지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60년에는 허정 과도내각의 문교부 장관에 취임하였으나, 4개월간의 단임이었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고, 민족문화추진위 발족에 참여하여 1982년에는 이사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1953년에 진단학회가 재건되면서 이사장에 선임되었고, 1980년에는 두계학술상이 제정되었다.

이후에도 연구를 계속하다가, 1989년에 노환으로 작고하였다.

연구[]

이병도는 1950년대 이후의 고대사학계를 이끌어 나갔다. 1955년에는 서울대학교 논문집에 〈남당고〉를 발표해 합좌제의 원형이 된 남당(南堂)의 실체를 밝히고, 고구려 국호 기원 문제를 해명하는 한편, 위만조선의 전개과정을 통해 위만이 조선계 인물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1930년대부터 시작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한국사 ─고대편─》을 출간하여 고대사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다.[3] 이후에도 고대사 연구뿐만 아니라 역사지리와 국가 기원 및 사회 제도까지 연구를 확대하여, 1976년에는 《한국고대사연구》를 출간하였다.

1977년에는 《삼국사기》에 역주를 달아 《국역 삼국사기》를 출간하고, 고대사·지리 도참과 함께 관심을 쏟고 있던 유학사를 연구한 성과는 1987년에 《한국유학사》를 간행하여 결실을 보았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실증주의 역사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실증적·객관적 방법을 중시하며, 철저한 문헌 고증에 입각한 연구 태도와 엄격한 학풍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문헌을 기본으로 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이 뿌리내리는 데에 큰 업적을 남겼다. 죽을 때까지 연구를 그치지 않았고, 왕성한 연구로 많은 저서와 다양한 논문을 남기기도 했다. 해방 이후의 고대사 연구에 독보적인 영향력을 끼치면서 이른바 ‘이병도 사관’이라 불리는 학맥을 구축하였다고 할 정도로 대한민국의 사학계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주요 저서[]

  • 《조선사대관 朝鮮史大觀》, 동지사, 1948, 1954(증보) - 국사에 대한 개설서
  • 《한국사》,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59(고대편), 1961(중세편)
  • 《고려시대의 연구》, 1948 - 박사학위논문
  • 《두계잡필》, 1956
  • 《(원문 및 역주) 삼국유사》, 동아문화사, 1956
  • 《자료한국유학사초고 資料韓國儒學史草稿》, 1957
  •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 《(역주)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 《율곡의 생애와 사상》, 서문각
  • 《한국사의 이해》, 삼성출판사, 1984
  • 《한국유학사략》, 아세아문화사, 1986
  • 《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7
  • 《한국상고사입문》, 최태영 공저, 고려원, 1989

상훈[]

가족 관계[]

  • 딸: 이순경
    • 사위: 장욱진(1918년 1월 8일 ~ 1990년 12월 29일 , 화가 )
  • 손자: 이장무(1945년 5월 14일 ~ , 서울대학교 총장)
  • 손자: 이건무(1947년 9월 19일 ~ , 용인대학교 예술대학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큰 아버지가 이완용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손자 이건무에 의해 근거가 없는 내용임이 밝혀졌다.

이완용은 우봉이씨 7세(世) 이교(李喬)의 16대손(代孫)이고, 이병도는 이교(李喬)의 동생 이주(李周)의 18대손(代孫)이다. 두 집안의 선조가 지금으로부터 5백년도 넘은 조선초기에 나뉘었기 때문에 이완용과 이병도가 같은 집안의 친인척 관계라는 지적은 전혀 사실무근이다.[4]

참고문헌 및 링크[]

주석[]

  1. 《오마이뉴스》 (2005.4.7) 서울대 일제청산위, 1차 친일인물 12명 발표
  2. 《한겨레신문》 (2005.3.28) 고대 총학 ‘친일행적’ 10명 발표
  3. 문창로, 〈고대사연구 60년의 동향과 과제〉, 《한국고대사연구》 제40권, 한국고대사학회, 2005년 12월, 351 ~ 390쪽.
  4. 김재범 기자.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 본지 보도에 대한 반론”. 브레이크뉴스. 
전 임
최재유
제7대 문교부장관
1960년 4월 28일 ~ 1960년 8월 22일
후 임
 오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