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공무원 이승만(李承晩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제1, 2, 3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1대 대통령이다. 일제시대에는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하고 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1947년 해방후 귀국하고 분단된 남쪽에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6.25사변을 거치고 1960년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하였으나 정권의 부패와 부정선거로 인해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되자 하야하여 망명하였으며 돌아오지 못하고 1965년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숨을 거두었다.
생애 초기[]
황해도 해주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인 이경선의 아들로 태어났다.[1] 초명은 승룡 (承龍), 호는 우남 (雩南).
배재학당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다가, 1890년대의 독립협회 때부터 정치 활동에 참여한 이승만은 중추원 설립 후 입헌군주제를 추진했다는 혐의로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고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나, 1904년 외국인 선교사들이 그를 빼내도록 협조를 해줘서 그는 4개월여 만에 풀려나틀:출처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7년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그리고 1910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2]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당시 박사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1910년 한국으로 돌아가 YMCA에서 교사이면서 그리고 감리교 선교사 생활을 하다가, 2년후에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1919년 4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혹은 집정관 총재)로 뽑혔으며, 1919년 9월에는 대통령으로 뽑혔지만, 여전히 하와이에서 살고 있었고, 1920년 12월에 처음으로 상하이에 도착해서 임시정부 사무실에 가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안 가 1921년 5월 미국의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가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던 데는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총장이었다는 점이 작용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외교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고, 외교활동의 주된 목표는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직제에도 없는 대통령 명함을 사용함으로써 안창호와 대립하였으며, 1921년 이후에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오지도 않았다. 이승만은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이유로 1925년에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했다. 그의 독특한 정치활동은 임시정부와 갈등을 일으킨 주요 요인이었다.
같은 시기인 1918년 4월 23일에는 경성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 그러자, 이 즈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워싱턴 D.C.에 집정관 총재 사무실을 열어 재빠르게 대외적으로 대통령 행세를 했다.[3]
그 후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 대표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안창호와 갈등과 반목이 계속되었다. 미국 내의 재미 교포 조직들은 안창호 지지 세력과 이승만 지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의 분열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미국은 중국 국민당의 강력한 요구에도,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해방 정국[]
-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선임되었다.[4] (조선인민공화국 참조)
- 1945년 10월 4일 뉴욕, 그 간 미국을 주된 활동 무대로 삼아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해온 이승만이 귀국길에 올랐다. 이승만은 하와이와 괌을 거쳐 12일 도쿄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맥아더를 만나 며칠 머문 다음, 미국 군용기를 이용하여 10월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승만의 귀국 경위는 매우 복잡해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 통일이 돼 있지 않지만,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견해는, 미 국무성은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지만, 미 군정청장 존 하지 중장이 그의 귀국을 원했다는 것이다.
- 귀국 다음날인 1945년 10월17일 오전 10시 존 하지의 안내로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존 하지의 대접은 극진했다. 저녁 8시 30분에는 서울 중앙 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방송을 했는데, 당시 그의 연설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였다.
- 1945년 10월 23일 자신이 소집한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조)
- 1945년 11월 21일 <공산당에 관한 나의 관념>이란 방송 연설을 통해 공산당에 대해 독설을 퍼부었다.
- 이후, 이화장을 자신의 사저로 쓰고 김구의 경교장과 대립했다.
-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되었다.
- 1946년 2월 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5]
- 1946년 3월 19일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퇴했다. 표면상 이유는 건강 문제였지만, 사실은 미 군정이 다음날 개최될 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철저한 반소(反蘇)주의자이며 신탁통치안을 격렬히 비판해 온 이승만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 1946년, 북한이 공산주의화 되어가자, 1946년 6월 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가진 유세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단독 정부'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그 내용은 사실상 단독 정부 수립을 역설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에 대해 김구는 이를 맹렬히 반대했다.
- 1947년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이를 쌍수로 환영하면서 이것이 모든 나라에 서광을 비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리 S. 트루먼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 한국에 이 정책을 수용케 함으로써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미군정의 정책을 포기토록 권하였다.
- 1947년 4월 5일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도중, 일본에서 맥아더를 만났고, 중국에 들러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환대를 받았다.
- 1947년 4월 21일 귀국하였다.
- 1947년 8월, 미 군정 관계자에게 테러리스트들의 좌익 공격을 금지할 수도 없고, 금지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대문구 갑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6]
-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의 이승만을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 1948년 7월 20일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제헌 국회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 이승만은 우익 진영의 최고 지도자였다.
남북대립과 한국전쟁[]
1948년 8월 15일, 광복 3주년 기념식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과 함께, 이승만은 제1공화국 제1대 대통령 취임식을 치루었으며, 1948년 9월 9일에 북한의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은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이듬 해인 1949년 6월 26일에, 김구는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저격을 당해 숨졌다.
1949년 9월 30일 외신 기자 회견에서 "우리는 북한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으며 북한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7]
- 1950년 6월 25일에 민족 동란인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8]
-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9] 북한의 인민군이 서울을 6월 28일에 점령하고, 전라도까지 위협하자,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10]
- 9월 15일 맥아더 미 육군 원수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여 13일 뒤인 9월 28일에 UN 연합군이 서울을 수복했다. 하지만 중국이 참전하였고 중공군의 대공세로 연합군의 대후퇴가 일어나는데 이것을 1.4 후퇴라고 하며, 서울에서도 후퇴하였고 10일 뒤에 되찾았다.
- 1951년 이범석으로하여금 자유당을 창당케 하였다. 자유당 참조.
- 1952년 8·5정부통령 선거에서 개헌의 1등 공신인 부통령 후보이자 족청계의 지도자인 이범석을 떨어뜨리고 함태영을 당선시키는데 앞장섰다.[11]자유당 참조.
- 1953년 5월 30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였다.[12]
주로 개성과 금강산에 이르는 곳에서 싸우다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 사이에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을 통과시켰지만, 1954년에 이른바 서울대학교의 한 괴짜 교수의 사사오입 사건이 일어나면서 부터 그의 인기는 서서히 하강 곡선을 타기 시작했다. 국회의장 이기붕은 결국 사사오입 사건은 없던 일로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부결을 선언했다.
1956년 대선의 해가 다시 밝고,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은 서로 유세를 하는 도중에 민주당 초대 총재이자 대통령 후보인 신익희가 병사했다. 그 당시에는 대통령 후보를 마음대로 못바꿨기 때문에, 부통령 후보인 장면만 내세웠다.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이승만, 부통령 장면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더 큰 권력을 원했고, 이기붕 역시 그러했다. 또한, 1959년에는 농림부 장관을 지낸 조봉암을 간첩죄로 사형시켜 버린다.
3·15 부정선거[]
운명의 해, 1960년. 역시 두 정당(자유당, 민주당)은 유세에 난리를 쳤는데, 상황이 1956년 때와 비슷하게 되었다. 민주당 제2대 총재이자,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미국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죽어버린 것이다. 이에 자유당은 참으로 추악한 정치공세를 펼친다.
선거일은 3월 15일이었고, 그 전날인 3월 14일에 자유당은 이미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고, 선거일 당일에는 돈을 주고, 한 사람이 투표지 20장을 가져가는 일까지 발생했다. 또한 비밀 투표가 원칙인 선거법에서 기표소까지 자유당 당원이 찍는 것을 감시까지 하였고, 야당인 민주당 선거 관리인을 투표소에서 쫓아내기까지 했다. 자유당은 자신들의 전략대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1960년 3월 16일, 마산에서는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 일어나 계엄령까지 선포되었고, 곳곳에서 학생들이 죽어나갔고, 서울에서도 심심찮게 데모가 일어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귀가하는 도중에, 정치 깡패들이 그들을 덮쳐 학생 2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승만의 인기가 땅에 곤두박질 치고, 1960년 4월에, 마산 앞바다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 학생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주검으로 발견되었고, 이것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4·19 혁명[]
1960년 4월 19일에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학생들은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후에 청와대로 개명)와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는 이기붕의 자택으로 일제히 몰려갔다. 그러나 경무대로 몰려간 학생들은 광화문 앞에서 저지를 당해, 수십 명의 학생들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기붕은 이미 자신의 자택을 빠져 나와, 서울에서 떨어진 양주로 피신하였고, 계엄 사령관 김종원은 강력히 막으라는 내무부 장관 최인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학생들을 돕는다.
한편, 이승만의 제1공화국 시절, 소위 '부부통령' 이라 불리던 권력의 제3인자,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장(직위 경무감, 현재의 대통령 경호실장)은 곡사포를 동원하여 학생들을 막았으나, 곡사포는 무너졌다. 경무대 정문을 부순 순간에, 갑자기 군인들이 덮쳐서, 여기서도 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했다. 하지만, 대대적인 데모는 계속 일어났고, 4월 25일에 묵묵히 지켜보던 대학 교수들까지 시위를 함으로써, 이승만의 제1공화국 정부는 무너질 위기를 맞고 있었다.
4월 26일 오후 1시에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이에 자유당도 해체하겠다고 발표했다. 오후 4시에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바로 아시아에서 최초로 장기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민주 혁명, 바로 4·19 혁명이다. 이기붕은 양주로 피신하고, 4월 25일에 몰래 경무대로 들어왔다. 당시 그의 장남 이강석 소위는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는데, 4월 26일 새벽 0시경에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망명과 죽음[]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한국을 떠날 때 영구 망명을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한 달 정도 잠시 피하는 걸로만 생각했다. 하와이에서 이승만은 향수병에 걸렸다.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1962년 3월 17일자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3월 16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3월 17일 박정희는 특별지시를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다. 3월 18일자 신문들도 사설을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다. [13] 이후 그 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91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가족[]
이승만은 태종 이방원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6대 독자이다. 아버지는 이경선. 누나가 둘이 있었으나, 해방 전에 세상을 떠났다. 오스트리아 여성인 프란체스카와 혼인하였으나, 자식이 없어서, 효령대군의 후손이자 이기붕의 아들인 이강석을 양자로 삼았다. 이우의 아들 이청도 양자 후보에 올랐으나, '왕정복고를 연상시킨다'하여 거부되었다. 이 후 이강석이 자살하여 대가 끊기게 되자, 종친회의 권유로 이인수가 양자로 입양되었다. [14]이인수는 명지대학교 법정대 학장을 역임한바 있다.
같이 읽기[]
- 평화선 : 일명 이승만 라인
- 이승만 내각: 제1공화국의 내각 명단
참고 자료[]
틀:위키인용집
틀:대한민국의 대통령
전 임 초대 |
제헌 국회의원(동대문구 갑) 1948년 5월 31일 - 1948년[15] 무소속 동대문구 을: 이영준 |
후 임 (보궐선거)홍성하 |
틀:무오 독립 선언 민족대표 39인
주석[]
- ↑ http://www.hartford-hwp.com/archives/55a/186.html
- ↑ (영어) Rhee, Syngman,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PhD Thesis, Princeton University, 1912.
-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5~26쪽.
- ↑ 허은, 〈8·15직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강만길 외,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역사비평사, 2000) 307~308쪽.
-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206쪽
-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28쪽. 친일 경찰 문제로 조병옥을 비판했다가 사직한 최능진도 동대문구 갑에 출마해 이승만과 대결을 벌이고자 하였으나 이승만의 방해공작으로 등록 무효선고를 받아 결국 이승만이 단독으로 입후보하게 되었다.
-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6쪽.
- ↑ 1950년 6월 26일~도움을 요청하였다.: 이한우,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하(下)》(조선일보사, 1996년) 78~79쪽.
- ↑ 1950년 6월 27일~대전으로 내려갔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년) 51쪽.
- ↑ 대전에서 사흘을~: 고은, 《만인보 17》(창비, 2004) 21~23쪽.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 66쪽.
- ↑ 1952년 8·5정부통령~당선시키는데 앞장섰다.: 안희수, 〈서론:정당의 형성이론과 한국정당의 발전과정〉,안희수 편저,《한국정당정치론》(나남, 1995),59쪽.
- ↑ 홍용표, 〈전쟁 전개과정에서의 한·미간의 갈등: 이승만의 북진통일론과 미국의 대응을 중심으로〉,한국전쟁연구회 편, 《탈냉전시대 한국전쟁의 재조명》(백산서당,2000),392~393쪽.
- ↑ 이승만은 1960년~: 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1960년편 3권) (2004년, 인물과사상사) 47쪽.
- ↑ 이승만은~입적되었다.:〈친인척 구설수 피한 이승만 전대통령〉, 굿데이, 2003년 3월 14일
- ↑ 1948년 7월 20일 제헌 국회의 대통령으로 선출됨에 따라 제헌 헌법 제53조에 따라 국회의원직을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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