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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형(李鍾馨, 1895년 4월 20일 ~ 1954년 2월)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만주 지역에서 밀정 활동을 한 것으로 의심 받고 있다. 다른 이름으로 이종영(李鍾榮)이 있고, 밀정 활동 중에는 권수정(權守楨)이라는 가명도 사용했다[1].

강원도 정선 출신으로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원산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대학1918년 졸업했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와세다대학 졸업생 명부에서 찾을 수 없어 믿을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복역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 또한 본인의 주장일 뿐 사료 가운데 보이지 않아 거짓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의열단에 위장 가입한 뒤 밀정으로 활동했다. 1930년 밀정 조직인 보민회와 같은 조직인 것으로 알려진 초공군(剿共軍) 사령부 조직에 가담하여 이 단체의 고문 겸 군재판관을 지냈다. 이종형에게는 군경 지휘권이 주어져 지린성에서 독립운동가 수십명을 직접 체포하여 살해하거나 투옥시켰다.

1931년부터는 동북군 총사령부 겸 동삼성 순열사위내고문의 직책으로 외교 부문을 담당하면서 밀정 활동을 계속했다. 그해 5월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여 《조선일보》 기자인 김이삼이 이 사건을 취재, 보도했다. 이종형은 김이삼이 진실을 알린 것이 일제에 불리하다 하여, 그를 속여서 붙잡은 뒤 사살하도록 했다. 정의부 소속 독립운동가 승진을 암살하고, 만주 독립운동의 대모로 불리던 남자현을 밀고해 결국 사망하게 한 사건에도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1년 귀국한 뒤로는 조선총독부 경무부의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광복 시점까지 중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을 밀고, 체포되도록 하였다.

1942년 친일단체인 총진회를 조직하였다. 총진회는 신토 계열의 친일 단체로 정춘수기독교 계열의 친일파들을 내세워 신사참배를 독려했다.

광복 후에는 우익 계열에서 활동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에 반공주의를 내세우는 《대동신문》을 창간했다. 대동신문은 미군정을 비난하고 여운형 암살 음모를 찬양할 정도로 극우적인 활동을 펴다가 정간 처분을 받았고, 이후 《대한일보》로 이름을 바꾸어 발행되었다. 이 무렵 흔하던 정치인 테러 활동을 뒤에서 지원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기도 하다.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에도 대동신문을 앞세워 정면 반대하였고, "반민법은 망민법"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궐기대회를 여는 등 적극적인 반대 활동에 나섰다.

이종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가 결성되어 1949년 1월 10일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반민특위가 최초로 검거한 박흥식에 이어 반민법에 의해 두 번째로 체포된 인물이었다. 반민법정에서도 자신은 만주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토벌했을 뿐이라고 증언했으며 스스로 독립운동의 터를 닦은 애국자를 자처했다[2]. 그러나 반민특위 해산으로 곧 풀려나왔고, 고향인 정선에서 국민회 소속으로 당선되어 대한민국 제2대 국회에 들어갔다. 1954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밀정 부문과 2005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 군 장교 부문에 선정되었다.

참고자료[]

주석[]

전 임
최태규
제2대 국회의원(정선군)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국민회
후 임
전상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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