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페인위키아
Advertisement

인조반정(仁祖反正)은 1623년 음력 3월 12일, 서인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세운 사건이다.

개요[]

소중화주의에 근거한 친명 세력이었던 서인은 신흥 강국인 청나라와 쇠퇴해가는 명나라 사이에서 사실상 중립정책을 펼친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또한 인목대비를 감금하고 폐서인으로 격하시키자 이를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1620년, 신경진이 처음으로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했고, 이귀 · 김류 · 김자점 · 최명길 등이 이에 동조했다. 1623년 음력 3월 12일 밤, 능양군을 주축으로 한 서인세력들이 반정을 일으켰다. 이이반이 이 일을 사전에 밀고하였고, 또한 반정 당일에 반정군을 지휘해야 할 김류가 제 때 도착하지 못하는 등 혼란이 있었으나, 이괄김류가 맡은 일을 대신하여 반정은 성공하였다.

숙청[]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고 이이첨·정인홍·유희분광해군 때의 권세가들이 대역죄로 참형당하여 대북은 몰락했다. 이 때 대북파로 몰려 참수된 자가 40명이나 되었으며, 숙청당해 귀양간 자가 200여 명이라 전해진다. 반정 모의에 참여했으나 밀고했던 이이반도 반역죄로 주살당했다. 이후로 대북은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났으며 북인정권의 우상인 남명 조식 계통의 남명학파는 크게 배척받았다. 얼마 후 광해군제주도로 다시 유배되었으며, 그 곳에서 18년 동안 살다가 생을 마쳤다.

내란과 호란[]

서인정권은 친명배금을 내세웠으나, 어의없게도 명나라에게 문전박대를 당해 무려 22개월이 지나서야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 받게 된다. 반정에 큰 공을 세웠던 이괄서인의 일부 기득권세력과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켜 서울이 함락되고 인조공주까지 피난가는 사태도 일어났으며 국제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구체적인 전략없이 무조건적인 친명배금정책을 실시하여 정묘호란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637년(양력), 병자호란에서 패망한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학계의 판단[]

일부 학자들은 인조반정을 보수세력의 반동적인 쿠데타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Nuvola apps important 이 문서는 한국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