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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自由黨)은 1951년대한민국에서 창당된 정당이다.

창당 과정[]

  • 195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1951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정당을 조직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1] 1951년 8월 25일 신당 조직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하였다.[2] 1951년 8월 31일 주중 대사로 있던 이범석이 귀국하고,[3] 이승만이범석에게 자유당 창당을 맡겼다.[4] 이 것은 이범석의 탄탄한 조선민족청년단 조직 기반을 이용하고 여기에 가장 조직이 큰 5개 사회 단체(대한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동조합총연맹, 농민조합총연맹, 대한부인회)를 자유당 산하 기간 단체로 편입시켰다.[5]
  • 1951년 12월 17일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자유당("원외 자유당")이 탄생했다. 그러나 1951년 12월 23일 소장파 의원들이 중심이 된 또 다른 자유당("원내 자유당")이 탄생했다.[6]

1952년 정·부통령 선거[]

  • 1952년 7월 19일 대전에서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범석을 공천하였다. 이승만은 이 전당대회에 메시지를 보내 후보 지명을 하지 말 것과 자유당에서 당수·부당수 이름을 제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7] 그러나 이는 발췌개헌안 자체가 이승만의 연임과 직선을 위한 것이 분명하였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또 하나의 흉계와 민의 동원 계획이었음을 시사하는 언명이었다. 직선제 개헌 파동을 전후해 차기에 출마할 의사가 없음을 수 차례 밝혔던 이승만으로서는 자신의 결정을 번의할 것을 요구하는 민의를 전국적으로 일으켜야만 했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재출마를 요구하는 탄원서에 350만명이 서명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과정을 거쳐 이승만1952년 7월 24일 '본의'는 아니지만 민의 압력에 굴복하여 양보했다는 걸 밝히면서 자신의 입후보 등록을 허락하였다.[8]
  • 그 계획의 또다른 목적은 이범석의 제거였다. 이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진 이상 이범석의 역할은 끝난 것이었다. 이범석은 당선을 확신하고 부통령에 출마하였지만, 이승만은 엉뚱하게도 선거 일주일을 앞두고 아직 입후보 선언도 하지 않았던 목사 함태영을 부통령 후보로 지지한다고 발표하였다. 목사 함태영은 당시 81세로 77세인 이승만보다 네 살 연상이었다. 이는 이승만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연장자를 부통령 후보로 선택함으로써 자기의 후계자 선택을 명백하게 회피했다는 걸 의미한다.[9]

주석[]

  1. 서중석,〈한국전쟁과 이승만정권의 권력강화〉《역사비평》제9호(1990년 여름)141쪽
  2. 연시중,《한국정당정치실록2:6·25전쟁부터 장면 정권까지》(지와사랑,2001) 37쪽.
  3. 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58쪽.
  4. 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59쪽.
  5. 윤용희,〈자유당의 기구와 역할〉,한배호 편《한국현대정치론1: 제1공화국의 국가형성, 정치과정, 정책》(나남,1990),279~281쪽
  6. 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60쪽.
  7. 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315쪽.
  8. 그러나 이는 발췌~등록을 허락하였다.: 윤용희,〈자유당의 기구와 역할〉,한배호 편《한국현대정치론1: 제1공화국의 국가형성, 정치과정, 정책》(나남,1990),296쪽
  9. 김정원,《분단한국사》(동녘,1985),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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