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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1950년 6월) 문서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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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195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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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이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뒤 [[6월 30일]]까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동하지 아니한 것에 대한 논란이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조선인민군]]의 탱크가 서울 중심부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전세가 유리함에도 불구하고,[[6월 30일]]이 될 때까지 [[한강]]을 건너지 않았다. 이렇듯 서울에서 3일간 머물렀다는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설이 제기되었다. == 가설 == === 첫번째 : 제한전쟁설 === 북조선의 전쟁계획이 남한 전역을 점령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가설이 있다. 즉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만 점령함으로써 [[전쟁]]을 끝내려 했다는 것이다. 이를 '제한전쟁설'이라 부르기도 한다. <ref> 조선인민군은 전세가~:[[박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2005년]]) </ref> 같은 맥락에서 "서울에 진주한 북한군 제1군단은 대규모 도하작전을 수행할 도하장비조차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목표가 통일정부 수립이었던 만큼 이들은 서울 진주 후 국회소집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서울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신속한 남하로 이것이 불가능해지자 북한군은 결국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추격전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된다. <ref> 한국정치연구회, 《한국정치사》(백산서당, 1990년) 220~221쪽.</ref> === 두번째 : 민중봉기설 === 하지만, 인민군이 서울에서 3일간 머무른 사실에 대해서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즉, [[민중]]들이 공산주의 운동을 일으키면, 이를 기반으로 남조선을 '해방'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중봉기기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수상인 [[박헌영]]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산업을 마비시키기 위한 [[파업]]을 선동한 것이 그 상황증거로 본다. 무엇보다도 북조선에 비해 남한에서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의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했던 점과 지주와 [[소작인]]간의 대립이 심했다는 점도 북조선 지도부가 공산주의 봉기가 [[민중]]들에 의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게 했다. 하지만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단점에도 불구, 토지개혁으로 계급갈등은 어느 정도 해소된 후였고, '남조선'의 공산주의 운동도 과격성으로 인해 사실상 몰락한 뒤여서 북조선 지도부가 기대한 민중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ref> [[이덕일,이희근 지음]], 《우리역사의 수수께끼》2권, (김영사, [[1999년]]) </ref> === 세번째 : 스탈린 개입설/마오쩌둥 개입설 === 러시아 국방부의 군사연구소 연구원 이고르 파포프는 입증 문서는 없다는 걸 전제하면서도 "[[스탈린]]은 미국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면 원자무기를 사용할지 모른다고 우려해서 [[김일성]]의 부산 돌진을 저지시켰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ref> 장행훈, 〈소, 미핵(美核)의식 '부산공격'저지:'6·25' 42주 … 러시아 군사연 파포프 연구원 특별인터뷰〉《[[동아일보]]》(1992.6.26.) </ref> 또한 [[마오쩌둥]]이 "전쟁은 보급로와 퇴로를 준비해야 한다"며 급한 추격적을 하지 않도록 여러 번 경고했고 미군 개입과 이에 따른 중국군의 개입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ref>정일화, 〈40년만에 다시 풀어보는 6ㆍ25의 수수께끼:3〉[한국일보]1990-06-17 05면 </ref> === 네번째 : 춘천 전투 === 최근 구 소련의 관련 문서가 공개되면서 북조선 인민군이 서울에서 3일간 지체할 수 밖에 없었던 새로운 이유가 제시되었다. <ref> [http://www.koreascope.org/gnuboard/bbs/board.php?bo_table=resource_kor_studies&wr_id=20&sca=%EA%B8%B0%ED%83%80%EB%85%BC%EB%AC%B8 코리아스코프,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에 대한 향후 연구 과제>] </ref> 소련 군사고문단이 작성한 남침 작전 계획서는 [[조선인민군 1 사단|1사단]], [[조선인민군 3 사단|3사단]], [[조선인민군 4 사단|4 사단]], [[조선인민군 6 사단|6사단]]과 [[조선인민군 105 땅크여단|105땅크여단]]으로 서울을 공략하고, [[조선인민군 2 사단|2사단]]과 [[조선인민군 7 사단|7사단]]은 [[춘천]]과 [[홍천군|홍천]]을 6월 25일 당일에 점령한 뒤, 6월 28일에 [[수원시|수원]]을 점령하여 [[한강]] 이북의 남한군을 포위하도록 되어 있었다. 실제로 6월 28일 당일 서부 전선에서 [[한국군]]의 가용 병력은 모두 한강 이북에 있었다. 그러나, [[춘천 전투]]에서 북조선군은 [[국군 6 보병사단|한국군 6사단]]의 저항에 부딪혔다. 춘천지구의 [[국군 6 보병사단|한국군 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 7연대는 6월 22일부터 경계태세를 강화하며 동시에 전장병의 외출을 금지시켰다. 그 때문에 북한군 2만4천 명은 6월 25일 새벽 춘천을 기습공격했지만 40% 이상의 전력을 상실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국군 6 보병사단|한국군 6사단]]은 3일간 북한군과 대치하며 춘천을 확보했으나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충주로 철수하면서 북한군은 애초 작전 계획보다 2일 뒤인 6월 27일 저녁 10시에야 겨우 춘천을 점령했다. 이 결과로, 한국군을 한강 이북에서 포위하겠다는 북조선군의 작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한국군은 급히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6월 28일 이후 도강한 개별적으로 후퇴한 패잔병들과 낙오병들을 긁어모아 편제를 유지하고 있던 일부 부대와 합치는 식으로 방어선을 펼칠 수 있었고, 이때문에 3일간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ref> 김종오, 《변질되어가는 한국현대상의 실상 上》(종소리, 1989), 249쪽.; 김영호, 〈한국전쟁 연구의 향후 과제와 전망〉,한국전쟁연구회 편 《탈냉전시대 한국전쟁의 재조명》(백산서당, 2000), 103쪽 </ref> ==주석== <references/> [[분류:한국 전쟁]] [[분류:1950년]]
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195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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