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전쟁 정보 한국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전쟁이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에서 전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나, 북조선에서는 남한이 먼저 북침했다고 주장한다. 6·25 사변, 조국해방전쟁(북조선), 조선전쟁(일본),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중국)이라고도 불린다.
배경[]
한반도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38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라져, 북쪽에 소련의, 남쪽에 미국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이승만과 김일성이 1948년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함과 동시에 남북 간의 긴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시작 전부터 38도 선에서 남측과 북측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남쪽에서는 국회의원 선거 등으로 인해 국군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어 비상경비에 돌입하고 있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며칠 전 비상사태가 해제되어 당시 일부 군인들이 휴가, 외박등으로 외출한 상태에서 북쪽으로부터 침입을 받게 되었다.
원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두 상대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에 있어 한국 전쟁은 적화 통일의 야욕을 가진 북조선 공산군의 침략을 저지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방어전이며, 대한민국국군의 주적은 어디까지나 북조선의 인민 무력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는 약간 다른데, 북조선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철수하지 않고 남아있던 주한미군을 남한에 대한 미국의 침략으로 간주, 북조선 인민 무력의 명분상 주적은 미군이었다. 원인의 대략적인 설명에는 다음의 네 가지가 있으나,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북조선의 김일성이 대규모의 남한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브루스 커밍스에 의하면 당초 예상했던 것 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한국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스탈린 주도설[]
한국 전쟁이 김일성이 아니라 스탈린의 의지로 발발했다는 설. 그 이유로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 미일평화조약의 견제, 미국의 위신을 떨어트리고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촉진하기 위한 무력 시위, 중국공산당의 독자 노선에 대한 견제 등의 이유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김일성 주도설[]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의지로 발발했으며,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 받고 일으킨 남침이라는 설로,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소련공산당의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으며, 중국에서도 1996년 7월 역사 교과서에서 한국 전쟁의 기록을 북침에서 남침으로 수정하였다.
한미 공모설[]
이승만의 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구할 것이라고 판단, 북조선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다.
북침 응전설[]
이승만과 미군의 주도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설. 대한민국이 먼저 전쟁을 시작했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설이다. 6월 25일 새벽 남한에서 38선 전역에 걸쳐 무력 침공을 감행하였고 최초에 전선 1-2킬로미터 가량 북진에 성공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바로 공격을 중단할 것을 대한민국 정부에 요구했으나 교섭이 결렬되었다. 인민군은 조직적인 반격을 개시해 국군을 38선 밑으로 몰아내고 낙동강까지 진격하였다고 주장하나, 인민군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또 준비에 최소한 1달 이상이 걸리는 상륙 작전을 9월 15일 동해안에 감행한 사실로 인해, 큰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내란 확전설[]
한국 전쟁은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기간을 포함해야 한다는 설이다. 1950년 이전부터 이미 정치적, 이념적 대립에 따른 국지적 무력 충돌이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확대되어 한국 전쟁이 되었다는 시각. 실제로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수많은 국지전과 무력 충돌이 있었으며, 1950년 6월 25일에도 사람들은 기존의 국지전의 연장으로 인식하여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전쟁 기간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 작은 전쟁( ~ 1950년 6월 25일) : 2.7 구국투쟁, 야산대 투쟁, 4.3항쟁,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38선 부근에서의 국지적 무력 충돌이 계속됨,
- 제한 전쟁(1950년 6월 25일 ~ 1950년 7월 1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제한적 무력 동원을 통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긴급 점령하여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함)
- 전면 전쟁(1950년 7월 1일 ~ 1950년 10월) :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스미스부대가 참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7월 1일부로 전시국가총동원령을 발함)
- 확대 전쟁(1950년 10월 ~ 1951년 6월)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후 국군 독단으로 38도 선을 넘어 북진 시작, 중국군 참전으로 이어짐.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듬)
- 고착/제한 전쟁(51.6월 ~ 휴전, 휴전협상과 함께 38도 선 근방에서 점령지 확보를 위한 국지전이 계속됨).
이러한 시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북침/남침설, 우발/의도설, 주도/응전설 등의 기존 시각이 모두 요점을 놓친 단편적 시각이라고 비판한다.
경과[]
전쟁 전의 남북 상황[]
1950년 6월 현재 북조선은 13만 5천여 명의 지상군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 때 대한민국의 병력은 정규군 6만 5천여명, 해양경찰대 4천여명, 경찰 4만 5천여명 등이었다. [1] 북조선군은 소련제 T-34/85형 탱크 242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반면 남한군은 한국 전쟁 직전까지 공군은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의 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연락기 및 L-5 연락기 외에, 전쟁 발발 직전 국민 성금으로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건국기 10대를 추가한 것이 전부였다. 육군은 탱크와 기갑 차량은 전무했으며, 유일한 독립 기갑연대의 장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정찰용으로 쓰인 37mm 대전차포를 탑재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1개 대대가 전부였다. 대전차화력으로는 보병용의 2.36인치 바주카포와 포병 병과의 57mm 대전차포가 있었지만, T-34를 격파할 수 없는 무기였다(미국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한국군의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스미스 대대가 치른 오산 전투에서야 자신들이 오판했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현대전의 핵심 지원 전력인 포병은 105mm 화포와 4.2인치 박격포만으로 무장하고 있었을 뿐더러 그나마도 사단 당 1개 대대만 배치되어 있었고, 포탄도 부족했다. 실제로 개성 - 문산 - 파주 축선을 방어하던 국군 1 보병사단은 전투 하루 만에 포탄이 바닥나 버렸던 것이다(백선엽의 회고록 참조. 한국군 사단 포병이 미군 수준으로 4개 대대로 구성된 포병연대급으로 증강된 것은 전쟁 후반기였다). 전체적으로 남한군은 단지 15일 간 전투 행위 수행이 가능한 보급품만 가지고 있었다. [2]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이 북조선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 [3]
전쟁의 발발[]
남한의 의견에 따르면,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한국군은 240여 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오는 인민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이전부터 38선 부근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많이 놀라지 않았으나, 잠시 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길은 없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북조선군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만 간단히 전하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복귀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하고 있었다. [4]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5]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6]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7] 6월 27일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이 있었다. [8]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민국은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다.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다리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 [9]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 나중에(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은 12년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 [10]
서울시민 144만6천여 명 가운데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서울을 빠져나간 사람은 40만명이었다. 그 가운데 80%가 월남동포였고 나머지 20%인 8만명이 정부고관, 우익정객, 군인과 경찰의 가족, 자유주의자들로 추정된다. [11]
6월 28일 새벽 인민군의 탱크가 서울 중심부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전세가 유리함에도 불구하고,6월 30일이 될 때까지 한강을 건너지 않았다. 이를 해석함에 있어서 많은 논란이 있다.(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1950년 6월) 참조)
2사단(사단장 박춘하(朴春河))은 의정부에서 북한군에 패퇴하고 남은 병력이 지금의 동작대교에서 광나루까지 방어진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12]
유엔군의 참전[]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대사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성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어 "북조선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미국의 제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유고슬라비아는 기권) [13]
이러한 결의를 북조선 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다시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어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14]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6월 30일 해리 S. 트루먼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 7월 1일 미국 육군 제24사단 21연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대대장인 중령 찰스 스미스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15]
스미스 부대의 패전 이후, 미군은 딘 소장이 이끄는 육군 24사단을 대전에 투입했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적의 선봉을 꺽고, 한강까지 북상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겠다고 장담했다. 그렇지만 미 육군 24사단도 T-34에 대적할 화기가 없었다. 대전을 공격하는 공산군(조선인민군)은 숫자도 많았고, 사기가 높아 T-34를 앞세워 미 육군 24사단을 공격했다. 계속된 공산군의 공격에 상당한 손실을 내던 대전의 미 육군 24사단은 마침내, 7월 20일, 패주하고 말았다. 사방에서는 압도적인 숫자의 조선인민군이 밀려왔고, 지휘계통이 무너진 가운데 미 육군 24사단은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제24사단장인 딘 소장은 함께 후퇴하던 부상병에게 먹일 물을 구하던 중 낭떠러지에서 실족하여 길을 잃었다가 인민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혔다.
인천 상륙 작전[]
맥아더 사령관이 지휘하는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9월 15일)에 성공함으로써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이어 달아나는 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에는 평양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렀고,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중국의 참전과 1.4 후퇴[]
한국군에 의한 무력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해방군이 사단급의 병력으로 전쟁에 개입하여 인해 전술로 반격해 왔다. 다시 국군은 50여 만 명의 인민해방군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국군 12만과 피난민 10만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고(흥남 철수 작전),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줄 수밖에 없었다(1.4 후퇴).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어 인민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인민군은 10여 만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아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다시 북진했으나 9·28 수복 후처럼 쉽지 않았다. 인민군이 이미 전 전선에 참호를 구축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휴전 협정[]
1951년 7월에 정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쟁(휴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하였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죽음으로 정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그 배경은 스탈린 참조), 1953년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국과 북조선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16]
북조선이 소련을 통해 휴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측의 승인으로 휴전이 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 휴전으로 매듭을 지어졌고, 현재까지 그 효력이 이어지고 있다.
피해[]
3년 1개월에 걸친 동족 상잔의 6·25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혔다. 6·25 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대한민국[]
미국의 통계에 의하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인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또한 미군에 의해 피난민들이 학살당한 노근리 학살사건, 거창주민들이 인민군 부역자로 몰려 학살당한 한국군의 대표적인 전쟁 범죄인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대중선동으로 인민군들이 우파들을 죽인 소위, 인민재판 등의 전시 민간인 학살피해자 즉, 전쟁 범죄 피해자들도 발생했다. 물론 이러한 민간인 학살은 오랫동안 은폐되었다가, 민주화된 이후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공개된 것이다. 소련의 통계에 의하면 북조선의 11.1%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는데 이것은 113만 명에 이른다.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미군은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베트남 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수이지만 훨씬 짧은 시기를 고려한다면 많은 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승만이 예상했던 대로 위기의 이승만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전쟁을 통해 아직 꼴을 갖추지 못했던 국가는 이제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군사적·경제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고, 전쟁 이전부터 이승만정권의 이념이었던 반공주의가 더욱 극심해져, 대한민국의 우경화는 더욱 심해졌다. [17]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쟁 과정에서 그리고 전쟁 이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됨으로써 '김일성 유일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더욱 급속하게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으나, 급진적인 단기정책들의 효과는 미비하여 60년대가 지난이후 대한민국과의 비교에서 경제적인 상황이 매우악화되었다. [18]
주석[]
- ↑ 1950년 현재~ 경찰 4만5천여명이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46쪽.
- ↑ 북조선군은 소련제~가지고 있었다.: 김학준, 《북한 50년사: 우리가 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동아출판사, 1995년) 146쪽; 로버트 T. 올리버, 박일영 옮김, 《이승만 비록》(한국문화출판사, 1982) 322쪽; 윌리엄 스톡, 김형인 외 옮김, 《한국전쟁의 국제사》(푸른역사, 2001년), 65쪽; 채명신, 《사선을 넘고 넘어: 채명신 회고록》(매일경제신문사, 1994년) 98쪽.
- ↑ 1950년 6월 24일~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 채명신, 《사선을 넘고 넘어: 채명신 회고록》(매일경제신문사, 1994년) 97~98쪽.
- ↑ 이전부터 38선~반복하고 있었다.: 노정팔, 《한국방송과 50년》(나남, 1995년) 159~160쪽.
- ↑ 1950년 6월 26일~도움을 요청하였다.: 이한우,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하(下)》(조선일보사, 1996년) 78~79쪽.
- ↑ 1950년 6월 27일~대전으로 내려갔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년) 51쪽.
- ↑ 1950년 6월 27일 새벽 4시에~정식으로 의결되었다.: 전쟁기념사업회, 《한국전쟁 제3권》(행림출판, 1992년) 39쪽.
- ↑ 6월 27일 아침 6시에~: 노정팔, 《한국방송과 50년》(나남, 1995) 161~162쪽.
- ↑ 김동춘,《전쟁과 사회: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돌베개, 2000),91쪽.
- ↑ 당시의 전황으로~: 이한우,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하)》(조선일보사, 1996) 84쪽.
- ↑ 서울시민~:김동춘,〈서울시민과 한국전쟁:'잔류'·'도강'·'피난'〉,《역사비평》 제51호(2000년 여름),45쪽.
- ↑ 김동선, 〈돌아온 老兵 “50년6월29일 수원서 맥아더 만났다”〉, 《시사저널》(1991.6.27. 제87호
- ↑ 이에 따라~(유고슬라비아는 기권): 이기택, 《국제정치사》(일신사, 2000년) 471~472쪽.
- ↑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김창훈, 《한국외교 어제와 오늘》(다락원, 2002) 50쪽.
- ↑ 6월 30일~: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 68쪽.
- ↑ 군사분계선 문제는~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온창일, 〈한국전쟁과 한미상호방위조약〉, 한국전쟁연구회 편, 《탈냉전시대 한국전쟁의 재조명》(백산서당, 2000), 389쪽.
- ↑ 한국전쟁은 이승만이~수 있었다.: 김동춘,《전쟁과 사회: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돌베개, 2000),292쪽.
- ↑ 전쟁 과정에서~계기를 얻었다.: 김동춘,《전쟁과 사회: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돌베개, 2000),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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