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페인위키아
Advertisement

10월 유신(十月維新)은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한 것을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선언에서 네 가지 비상조치를 발표하고 10월 27일 의결되어 11월 21일 국민투표로 12월 27일제3공화국 헌법을 개정했는데, 이 때의 헌법을 유신 헌법이라 하며, 유신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이 체제 하에서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 및 국회해산권을 가지며, 임기 6년에 횟수의 제한 없이 연임할 수 있었다. 또한, 대통령 선출 방식이 국민의 직접 선거에서 관제기구나 다름없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간선제로 바뀌었다. 유신 체제는 행정·입법·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역사[]

배경과 설립 과정[]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67년 재선에 성공하였다. 제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직을 1회에 한하여 중임이 가능하게 하였으나, 박정희는 1969년 삼선 개헌을 통하여 1971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여러분께 다시는 나를 찍어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하였는데, 이에 상대 후보였던 김대중은 '박정희가 헌법을 고쳐 선거가 필요없는 총통이 되려 한다'고 주장하였다.

파일:10월 유신을 발표하고 있는 김성재.jpg

10월 유신을 발표하고 있는 당시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

1972년 10월 17일 당시, 김대중을 가까스로 누르고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우리의 정치체제를 개혁한다'며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었고, 계엄사령부는 정치 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지하고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도록 하며, 대학들을 휴교시켰다.

이 헌법은 직접선거등의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확장시켜 사실상 독재가 가능하게 한 것이라서, 대학생들과 교수 등 사회인들은 유신독재에 맞서 데모를 하기도 하였다.

유신체제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끝났다.

이후 한태연, 갈봉근 등의 학자들과 김기춘과 같은 젊은 검사들이 만든 헌법개정안(이른바 유신헌법안)이 10월 27일대통령 특별선언에 따라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게 한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공고되었고, 11월 21일국민투표에 부쳐져 투표율 91.9%, 찬성 91.5%로 확정되어 12월 27일공포되었다.

유신 헌법안이 국민투표로 통과한 1주 후인 11월 28일, 박정희 정권은 대학에 대한 휴교조치를 해제하였으며, 12월 14일 0시를 기하여 계엄령을 해제하였다. 비상계엄을 해제한 다음날인 12월 15일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2,359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고, 12월 23일 박정희가 단독입후보한 가운데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찬성 2,357표, 무효 2표로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가 선출되었다.

재신임 투표[]

1975년 1월 22일, 박정희는 유신 체제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자 특별담화를 통해 유신 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특히 “이번 국민 투표는 비단 현행 헌법에 대한 찬반 투표뿐만 아니라 대통령에 대한 신임투표로 간주하겠다”고 말했다.

1975년 2월 12일, 유신 헌법 찬반을 묻는 재투표가 실시되어 유권자의 80%가 투표에 참여, 찬성 73%, 반대 25%로 유신 헌법은 형식적 재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유신에 대한 찬반토론은 고사하고 유신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이 긴급조치에 의해 금지되고 언론이 통제된 상황에서 관료들의 투표종용을 통해 이러한 결과를 도출했다는 점에서, 결과만 놓고 이를 드골의 신임 투표(1962년 10월 프랑스 국민투표, 1969년 프랑스 국민투표)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독재와 저항[]

박정희 정권은 유신 체제를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선전하였으나, 찬성하는 국민들조차 이를 민주정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 따라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국민의 반발과 저항이 거세어지고, 일부 학생들은 전국민주청년학생연합(약칭 '민청학련')을 조직하여 전국적인 연대투쟁을 벌였으며, 언론인들도 자유언론수호투위를 결성하는 등 저항의 강도를 높여 갔다. 1974년 11월에는 야당 정치인과 종교인 등이 중심이 되어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1971년 대통령선거의 경쟁자였던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그를 1973년 8월 납치한 뒤 자택에 연금시켜 국내외에 큰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으며, 1975년 8월에는 개헌청원운동을 벌이던 장준하등산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박정희1974년 1월부터 이른바 '긴급조치'를 잇따라 발동하여 교수, 학생, 언론인, 종교인, 문인 등 민주인사들을 투옥하거나 해직시켰다. 유신 체제가 출범하자 평양정권은 1973년 8월 남북대화의 중단을 선언하여 남북 관계도 경색되었다.

유신반대운동이 고조되던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행사에서 문세광이 박정희를 저격하였고, 그 유탄에 박정희 아내인 육영수가 절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1975년 4월에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박정희는 이를 빌미로 각 대학에 '학도 호국단'을 조직하고 '민방위대'를 창설하는 등 군사통치를 한층 강화하였다.

1978년 12월 박정희는 관제기구나 다름없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연임에 성공하였으나, 이에 앞서 실시된 제10대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민주공화당을 득표율에서 앞서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또한 공화당 내에서도 장기독재에 대한 부담과 염증으로 이탈하는 인사들이 속출하였고, 미국에서도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카터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을 강도높게 비판하는 등 국제 정세 역시 박정희 정권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게다가, 이 무렵에 불어닥친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해 중공업 중심의 국내 경제가 극심한 타격을 입으면서 박정희의 정권 유지 가능성에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하였다.

종말[]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가속화한 것은 부마항쟁이었다. 1979년 5월 말, 야당인 신민당 당수로 선출된 김영삼YH 사건에 개입하는 등 적극적인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자, 박정희 정권은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을 동원하여 그 해 10월에 국회에서 김영삼을 제명하였다. 이 사건으로 국내외 여론의 지탄이 더욱 높아지고, 마침내 부마항쟁으로 불리는 대규모 저항운동이 부산·마산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대한 처리를 두고 박정희의 최측근이던 중앙정보부부장 김재규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이 각각 온건과 강경으로 맞선 가운데 10월 26일, 청와대 부근의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박정희차지철을 총격 살해하였다. 이로써 유신 체제는 끝나고, 이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집권하게 된다.

같이 보기[]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