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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마산시위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경상남도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로 일어난 시위이다. 이는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요[]

1960년 3월 15일 마산시의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를 비롯한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했다. 이들은 당사로 돌아와 10시30분에 선거 포기를 선언했으며, 이내 시위를 준비했다. [1] 민주당 의원 정남규를 중심으로 한 당 간부들이 앞장을 섰고, 저녁 7시 30분경 1000여 명의 마산 시민이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 모이게 했다. 시민과 학생들이 뒤를 따르는 시위대가 행진해 감에 따라 시위군중은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경찰이 정남규 등 당 간부들을 연행하면서 강력 대응하자 오히려 시위군중은 더욱 늘어나 밤 8~9시경에는 만여 명이 넘었다. 이 때 경찰과 대치하였는데 정전이 되었다.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고 경찰의 발포는 시위대를 분노하게 만들어 돌을 던지며 이에 맞섰다. 시위대는 경찰의 총격에 쫓기면서도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남성로파출소, 파출소장의 집 등을 파괴했다. 자유당 의원 허윤수의 집도 파괴되었다.[2] 허윤수는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뒤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겨 시민들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이 찍혔을 뿐만 아니라 경찰 책임자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났었다.[3]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을 당했다.[4]

수습[]

국회조사단은 이날의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총격이 시위대의 해산이 아닌 살상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밝혀 내었다. 하지만, 정작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마산 시위가 공산당이 사주해서 벌어진 일인양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정치부 기자들과의 회견 자리에서 마산 시민들에 대한 정부의 강경 대응을 따져 묻자, "총은 쏘라고 준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5]

바깥 고리[]

주석[]

  1. 마산시의 민주당~:연시중,《한국정당정치실록 2:6·25전쟁부터 장면 정권까지》(지와사랑, 2001),233쪽.
  2. 민주당 의원 정남규를~:연시중,《한국정당정치실록 2:6·25전쟁부터 장면 정권까지》(지와사랑, 2001),234쪽.
  3. 허윤수는 민주당으로~:정용욱,〈이승만 정권의 붕괴(3.15~4.26):이승만 정부의 대응 및 미국의 역할과 관련하여〉,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한국현대사의 재인식 4:1950년대 후반기의 한국사회와 이승만정부의 붕괴》(오름, 1998),240쪽.
  4. 경찰의 발포로~:동아일보사,《민족과 더불어 80년:동아일보 1920~2000》(동아일보사, 2000)340쪽.
  5. 이만섭, 〈이승만의 몰락,피플파워 현장:이만섭 전국회의장 회고 3·15마산의거〉《신동아》1995년 4월, 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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